한국 무교회의 實相
내가 한국 무교회를 접한 것이 1975년으로 생각한다. 그 때 한국 무교회는 희망이 있어 보였다. 내가 무교회 모임이 좋았던 것은 성서를 공부하는 모임이라는 것이 좋았다. 기성교회 목사님들 같이 설교가 아니라 성서를 한 절, 한 절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무교회에 나오는 분들이 대체로 교육을 담당하시는 선생님들이 많았는데 그런 것에 긍정하였다. 아! 저분들이 참 교육을 하면, 이 나라에 희망이 있겠다고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그 선생님들은 나에게 큰 실망을 주었다.
그러면 성서를 한 절, 한 절 공부하였던 일들이 왜 나에게 실망으로 다가오고, 또 무교회에는 교육을 하시는 선생님들이 많았는데, 왜 실망하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하고 싶다.
한국 무교회에서 성서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답습하는 공부를 하였는데, 그것이 나에게 실망으로 다가왔다. 왜 답습하는 공부가 실망인가? 답습 공부를 사전에서 보면, “남의 입에서 흘러나온 지혜를 줍는다는 말로, 남의 말이나 글 또는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선인(先人)들의 공부를 나열하며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는 공부를 말한다. 즉 루터는 이렇게 해석을 하였다 또는 내촌은 저렇게 이야기하였다 하고 자신의 의견을 적는 공부를 말한다.
공부란 것은 자신이 본 그대로 말하고 글을 쓰고 하여야 할 일인데, 그리하지 못하고 유명한 분들의 공부를 답습으로 적어 놓고 공부라고 한다. 예를들어 복음서를 공부하는 사람은 자신이 본 복음서의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느낀 점을 그대로 말하고, 글을 쓰고 하여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보지 않고 루터, 칼뱅, 내촌이 이야기하였던 것을 주워다 놓고 공부라고 한다.
그러면 답습 공부를 하면 어떤 결과가 오는가? 그 말들이 계속 이어져 그것이 하나의 정통 공부, 정통 신앙으로 자리 잡아 새로운 공부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것들이 다른 사람의 새로운 공부를 이단시 하는 시각으로 흐른다.
그러나 알고 보면 공부는 새로운 시각으로의 공부가 계속되어야 진리 발견이 있고, 새로운 진리가 발견되므로 십자가의 진리가 높은 경지에 올라, [존 밀턴]의 말과 같이 “온 인류가 새로운 십자가의 진리로 인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세상이 충만하여 질 때에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 같은 공부가 나올 수 있을 일이다. 그런데 한국 무교회는 답습공부만이 참 공부인 것 같이 새로운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낙인찍었던 일들이 있다. 이단이라는 도장을 받았던 사람이 필자와 노()무 선생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일찍이 “성직자 외, 누구나 성서를 해석할 권한이 있다”고 천명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무교회에서 개인잡지라도 발간하는 사람들은 자신들만 성서 해석권이 있는 것 같이 다른 사람들을 단죄를 한다. 이단이라 단죄를 당한 노()무 선생의 성서공부는 생명력이 넘쳐흐르고 있다.
만약 성서공부를 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자신의 시각으로 공부 할 수 없다면, 그런 사람은 성서공부나 성서잡지를 내지 말아야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논리 정연하게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성서공부를 하여 세상에 내놓으면, 세상은 소용돌이치고, 그런 공부를 한 분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세상이 이렇게 혼탁한 것은 인류가 성서공부를 하면서 자연과학과 통하는 성서를 발전시켜 읽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 무교회에는 교육을 하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나는 그러한 일들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정말 저분들이 “스위스 페스탈로찌”와 같은 교육사상에 그리스도교 진리를 접목하여 교육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요즘 그들을 보면 대체로 전교조를 싫어하는 쪽에 서 있는 것을 본다.
전교조에서는 촌지를 없이하는 일에 앞장섰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렇게 큰일을 하였는데, 한국 무교회에 속해 있는 선생님들이 싫어한다. 좀 생각해 볼 문제이다. 물론 전교조가 다 잘한 일만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저들의 초심은 없어지고, 자신들을 위하여 보수 중에 보수가 되어 있다고 보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교육 현장에서 촌지가 없어지게 하였다는 것은 크나큰 일들이다. 촌지가 학교에서 없어지게 하였다는 것 하나만 생각하여도 전교조는 큰일을 하였다.
또한 한국 무교회에서 활동하는 학교선생님들은 보수 정부를 지지하는 선생들이 대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 죄로 죽었던 생명을 십자가의 피 뿌림을 받아 다시 거듭나게 하는 ( 벧 전 1:1) 복음을 전한다는 분들이 전교조를 싫어하고 보수 정부를 지지한다. 한번 쯤 다시 생각할 문제이다. 한국 무교회 신앙잡지를 내는 분들이 대부분 이런 분들이다. 나는 이것에 실망하였다.
6, 25 한국 전쟁이후에 이승만 정부와 군사정부에서 공산주의를 멸한다하며 간첩죄를 덮어씌워 얼마나 많은 애국자들을 죽였는가?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경쟁자인 ‘조봉암’ 씨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959년 7월 31일 사형시킨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러한 일들에 앞장선 보수정부를 지지하는 그리스도인 교육자들이 있다고 할 때에 한국 무교회는 희망이 없다 특히 성서잡지를 내는 분들이라면 더더욱 희망이 없다.
대한민국에 있는 종교 중에서 카톨릭교가 그래도 진보적으로 보인다. 다음에는 불교이고, 기독교이고, 무교회는 극 보수이다. 한국 무교회에서 개인 성서잡지를 발간하시는 분들이 대부분 태극기 집회를 지지하는 분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보수가 될 수 없다. 왜 그런가? 신앙은 살아있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어 날마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이 신앙이다.(고린도전서 4: 16) 그런데 어떻게 보수가 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신앙이라고 하지만, 신앙이 아니라 계시록에서 말하는 죽은 신앙이다.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실은 죽은 신앙이다.
또한 기성교회는 현금이라도 하여 자신들의 마음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 무교회 사람들은 현금도 없다, 물론 현금이 꼭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데 쓰인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무교회는 헌금을 내는 제도가 없다고 하여 헌금을 내어 좋은 일에 쓰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즉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시는 독립된 씨알이라고 할 때에, 자신이 노력하여 얻은 수입에서 어느 정도 사회에 환원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예를 들자면 좋은 책을 발간하는 곳에 기여를 한다든지, 독립 전도자에게 교통비라도 지원 같은 환원을 하여야 할 일이다. 그러나 무교회이라는 이름 아래 이러한 일도하지 않으면서 무교회 이름만 앞세우며 신앙이라고 할 때에 참 편리한 신앙으로 보인다. 무교회는 이렇게 하면서도 기성교회를 비판할 수 있겠는가?
‘일심모임’에 나오시는 N선생이란 분이 있다. N성생은 마음으로 10의 1을 저금하여 장학금도 주고, 또한 꼭 필요한 분에게 써 준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마땅히 그리스도인이라면 믿지 않은 사람들 보다 한걸음 앞서 진 일보(一步)하는 삶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일이 있다. 그런데 십일조를 사회에 환원이라고 할 때에 율법으로 또는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하여 사회에 환원은 있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시랑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고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자각하여 감사와 감격하여 사회에 환원이 있어야 할 일이다.
한국 무교회 신앙인들은 나 자신부터 자기 자신을 뒤돌아보아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뒤돌아보고 내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과 답도 하여야 할 일이다. 이리하여 한국에 기성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 무교회도 회개하여 각 각의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다하여야 할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삶터이다.
삶터의 주인으로 서 있다.
어느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주인이다.
어느 누구에게나 스스로 섬기는 자로 서 있다.
이런 사람은 “풍부에 대처할 줄도, 비천에 대처할 줄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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