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공부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인류 부활의 예고 (3)

임중기 2013. 9. 5. 20:05

< 요한복음 공부 제50과>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인류 부활의 예고(3)

본문 말씀 11: 28-37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 하였는가’ 하며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본문 분해

28절 선생님이 너를 부르신다

29,30절 마리아, 예수께 나아가다

30절 예수는 마르다의 맞던 곳에 계셨다

31절 유대인들, 마리아를 따라감

32절 마리아의 하소연

34절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35절 예수, 눈물을 흘리시다

36절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를

37절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못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통분의 눈물을 깊이 생각하라

 오늘도 같은 말로 시작한다. 통상 성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통분(痛憤)의 눈물’을 잘 못 공부하여 왔다고 생각된다. 한 예로 최선근 선생의 『요한복음 주해서』에서 이 대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마리아가 발 앞에 엎드리어 흐느껴 우는 애처로운 모습에 접하여 깊은 심령에서 용솟음치는 동정심과 유대인들의 관습적으로 우는 그들의 행동의 베일 속에 숨겨진 불신과 위선, 그리고 인간들의 죄와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한 사탄에 대한 분노로써 심령에 통분(痛憤)히 여기셔서 울었다”고 보았다.

 이어서 최 선생은 ‘통분’과 ‘민망’에 대한 원어 해설을 곁들였다.

〇통분 ; ‘성난 말이 콧김을 뿜는다’는 말이며 큰 감정의 파동으로 말미암아 정신적으로 억압되었을 때에 나오는 발음.

 

 〇민망 ; 정신적으로 교란 되었다. 당황하고 낭패하였다.

위에서 원어의 해설은 잘 하였다고 본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랑하는 마리아가 발 앞에 엎드리어 흐느껴 우는 애처로운 모습에 접하여 같이 울었다” 는 대목의 해석은 잘 못되었다고 본다. 그것은 마르다와의 대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11:23∼26)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나사로가 다시 살리라’고 하였는데 마리아는 예수 발 앞에 엎드리어 울고 있음을 보고 통분(痛憤)을 느끼고, 민망해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시여 제일 사랑하였던 마리아지만, 장차 하늘의 생명인 자신을 던져 죄악 속의 인류를 새 생명으로 살리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통분이었다. 이때에 분명히 마리아는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오라비 나사로를 살리려 오셨다는 것을 알았다면 예수께 나아가 “선생님이 오셨으니 이제 저의 오라비는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하면서 영접했어야 맞는 일이다. 그런데 오히려 “선생님이 여기 계시지 않아 제 오라비가 죽었습니다.” 원망을 하며 울고 있다. 이에 대한 통분(痛憤)이다.

 

원어의 해설로 돌아가 생각해 보면

‘통분’성난 말이 콧김을 뿜는다는 말이며, 큰 감정의 파동으로 말미암아 육체적으로 억압되었을 때에 나오는 발음이라고 하였다.

 

‘민망히’“정신적으로 교란되었다, 당황하고 낭패하였다 뜻”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무슨 낭패인가? 마리아는 나사로를 살리실 분으로 예수를 영접하지 못하고 ‘선생님이 여기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죽었다’고 하며 발치에 앉아 우는 모습을 보면서 느꼈던 낭패감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함에 대한 민망이다. 이어지는 말씀에서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33,4) 책망의 말이 담긴 질문이다.

 

예수께서 사랑하는 마르다와 마리아까지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한 통분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그 토록 많은 말로 너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건만, 진실어린 말을 믿어준 사람이 없었다는 슬픔의 통분이다. 그런데 마리아 곁에 있던 소수 유대인의 의견같이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 하였는가’ 하며”(36) 성서 공부 한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께서 마리아를 사랑하여 울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니다. 나사로를 살리려 오셨는데, “선생님이 여기 계시지 않아 내 오라비가 죽었다”는 원망의 말에 의한 통분이다.

 

본문 공부

 28절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이 말을 하고’는 49과에서 공부했던 대로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절) 라는 말이다. 이 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동생 마리아를 불러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고 말한다.

 

 29,30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예수님이 부르신다는 말에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예수님을 뵈러 나아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르다와 이야기 하시던 곳에 아직 그대로 계셨다. 왜 그곳에 그대로 계셨을까? 마르다는 보편적인 미래(未來)의 부활관(復活觀)으로 이야기하여 예수께서 오신 목적에 맞지 않은 대답을 했었다. “선생님께서 오셨으니 저희 오라비를 살리실 수 있습니다.” 라는 환영의 말을 했어야 옳을 것이다.

 

 31절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마리아가 언니 마르다의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나올 때에 마리아를 위로하던 유대인들도 그녀가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 나왔다. 이리하여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나오게 되었다.

 

 32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더라.”

마리아는 예수께 나오자 인사를 드리고,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리어 울면서 원망(怨望)의 말을 하게 된다. ‘선생님이 여기 계시지 않아 내 오라비가 죽었다’고. 마치 자신의 오라비가 죽은 원인이 예수께 있다는 말과 같다. 마리아가 예수님이 오심으로 자신의 오라비가 살아나게 되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면 의당 “이제 선생님이 오셨으니 이제 제 오라비는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했어야 할 일이다.

 

 33절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예수께서는 저들의 오라비 나사로를 살리려 왔는데 도리어 원망의 말을 듣게 되고, 또한 마리아와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한 마음과 민망한 마음도 가지신다.

내가 그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을 저들과 말씀으로 능력으로 함께 하였건만 그렇게 나를 모르는가-하는 마음과, 유대인들의 관습적 의례적인 울음에 대해 통분한 마음이다.

여기서 통분의 뜻과 민망의 뜻을 최선근 선생의 원어해석에서 되새겨 보자.

 

‘통분(痛憤)’은

(1) 성난 말이 콧김을 뿜는다.

(2) 큰 감정의 순간의 파동(波動) 곧, 정신적인 진동의 뜻이다.

(3) 육체적으로 억압되었을 때에 나오는 발음(發音)이다. (예수 자신과 마음으로 하나 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의 진노의 발음이라고 하겠다)

 

‘민망히’는

(1) 정신적으로 교란! 되었다는 뜻

(2) 당황하고 낭패하였다는 뜻

 

 34절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와서 보옵소서’ 하니”

그를 어디 두었느냐?”는 책망의 질문이다. 자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책망의 뜻을 담아 “그를 어디 두었느냐?”고 예수께서 묻는다. 그러자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며 마리아가 앞장을 선다.

 

 35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살리려 왔는데 환영은 받지 못하고, 오히려 원망(怨望)을 듣게 되었다. 이리하여 순간적으로 통분과 민망이 교차 하면서 흘리게 된 눈물이다.

 

 36절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 하였는가’ 하며”

예수께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마리아와 유대인들의 행동에 통분과 민망의 눈물을 흘리시자 유대인들은 보편적인 사랑의 감정에 젖어 울었다고 보았다.

 

 37절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자 유대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도 그 사람을 죽지 못하게 할 수는 없었던가봐.”라는 야유성 말을 하였다고 했다.

정말 그 많은 시간 동안 표적과 말씀으로 자신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말씀을 헤아릴 수 없게 하였으나, 단 한 사람도 자신을 바르게 보지 못한 것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통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천우 예배모임 안내

 때 : 매월 두 번째 일요일 오전 10시 30분

: 스피치와 변화 4층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6가 1-15번지 (영등포 시장 로터리)

 

 1부 예배모임 사회 : 임효성

말씀 하시는 분 : 이기영 목사님, 한장희, 임중기.

2부 신앙 간담 사회 : 정인순

 

 연락처 : 정인순 (011-768-8865)  임중기 (010-6346-3736)

매월 (2번째 일요일) 오전 10시30분시 예배모임이 있습니다.

 10시 30분 오시는 대로 돌아가며 성경을 몇 귀절씩 읽고 11시에 시작합니다. 모임이 끝나면 점심을 같이 하고 해산합니다.

 

지하철 1호선 이용시 : 영등포역에서 하차 후 (롯데백화점 방향)으로 나와 신세계 백화점과 경방필 백화점을 지나 영등포시장 로터리 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스피치와 변화’ 간판이 보임

지하철 5호선 이용시 : 영등포시장역에서 하차, 4번 출구로 나와 200미터 직진 후 우측 모닝글로리 문구점을 끼고 우회전 하면 ‘스피치와 변화’ 간판이 보임

주차장은 ‘영남 주차장’이용

 

중국어를 배웁시다.

 2012년 4월 8일 모임부터 예배 후에 중국어 공부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천우 모임에 나오시는 이정혜 선생의 (중국어 교사) 도움으로 천우모임 식구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쳐 주시겠다 하시여 천우모임 식구들이 중국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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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공부 발표 2013년 9월 10일 (비매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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電話 010-6346-3736 요한복음공부 발표인 임 중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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