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요한복음 공부 제24과>
모든 인류에게 생명의 떡을 떼어 주심
본문 말씀 6:1∼15
본문 분해
1,2절 큰 무리가 따르다
3-5절 떡을 어떻게 먹이겠느냐?
6,7절 빌립을 시험하시다
8,9절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10,1절 오천 무리에게 떡을 먹이다
12,3절 남은 조각 열두 바구니
14절 세상에 오실 선지자
15절 산으로 떠나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의 이정표
옛 말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바꾸면 ‘모든 길의 이정표는 로마를 안내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는데, 성경 안에도 이정표 역할을 하는 부분이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안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성서를 읽는 사람은 성경 속에 표시된 십자가의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를 잘 보아가며 읽을 때에 성경이 제시하는 진리를 바르게 볼 수 있다.
요한복음서에서 중요한 이정표 대목을 든다면
첫째,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3:14)
둘째,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6:4)
위의 두 말씀을 들 수 있겠으나 여기에서는 오늘 공부하는 6장 4절의 “유월절”의 의미에 관하여 본문 공부에 앞서 짚어보기로 한다.
유월절의 의미
유월절은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십자가의 진리를 찾아가는 데에 매우 중요한 이정표가 되고 있다.
“이 달 십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會衆)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門) 좌, 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출 12:6∼9)
유월절에 양을 잡아먹는 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애급의 모든 백성과 짐승의 맏이를 죽게 하는 재앙을 내리게 되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이 재앙을 피해가는 방법으로 양을 잡아먹고, 그 양의 피를 방문 앞의 인방에 바름으로 해서 그 집 안의 사람은 죽이지 않고 재앙의 사자가 그냥 지나간 것을 기념하는 전통적 의식이다. 그런데 양을 잡아먹을 때에 뼈는 하나도 상함이 없이 살만 발라 먹으라고 율법은 가르치고 있다.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두지 말며 그 뼈는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민9:12)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시 34:20)
유월절에 어린 양을 잡아먹되 그 뼈는 하나도 꺾지 말라는 엄명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한 1:29)라며 예수를 어린 양으로 처음 부른 사람은 세례 요한이다.
세례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본 것은 희생양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애급의 바로 밑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 받기위하여 어린 양이 희생되었던 것처럼 세례 요한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인류가 먹고 구원받게 될 줄을 알고 어린 양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참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린 양이면서, 참포도나무이다. 어린 양이란 표현은 구약의 유월절 양을 이어받기 위함이요, 참포도나무는 신약의 진리를 바르게 설명 하시려고 참포도나무로 표현하신 것이다.
덧붙여 설명하면 구약의 유월절 ‘어린 양’과 예수가 말씀하신 신약의 ‘참포도나무’ 사이에 필요한 것이 5절 이하의 ‘떡 기적’이다. 이 기적은 오천 명에게 떡을 떼어 나누어 줌으로 해서 곧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떡을 당신의 손에 놓고 떼어 접붙임 하시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상징인 것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 ‘대속! 속죄’의 죽음이라면 어린 양의 고기를 살만 발라 먹는 기사는 필요하지 않게 된다. 양의 피를 인방에 발라 표시하면 되는 것이다. 구약의 어린 양을 먹듯, 신약의 예수의 살과 피로 접붙임 받아야 우리에게 예수의 생명이 있는 것이다. 이래서 ‘대속’이 아니라 ‘접붙임의 만남’이다.
본문 말씀 공부
1절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5장 47절에서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그(모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고 책망하신 그 후라고 읽으면 좋겠다.
2절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예수께서 디베랴 건너편으로 가시니 주변에는 큰 무리가 모여들었는데, 그 이유는 예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기적을 사람들이 보았기 때문이다.
3절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산에 오른 예수를 따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음으로 멀리서도 잘 보이도록 높은 곳에 자리를 잡은 모습이다.
4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3-5절 기사에서 4절을 빼도 기사는 자연스럽게 연결 된다. 그런데 요한이 편집 과정에서 4절을 넣은 것은 방향의 표시-즉, 이정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즉 어린 양고기와 무교병을 먹는 전통의 유월절을 앞두고 오천 명의 무리에게 떡을 떼어주어 먹게 함으로 이 떡은 유월절의 의미와 같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5,6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양떼가 목자를 따르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바, 마침 유월절이 가까웠음으로 그들에게 음식을 먹이고자 하여 제자 빌립에게 물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미 어떤 일을 하실 것인가를 아시지만, 제자인 빌립은 과연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그 대답을 들어보기 위함이었다.
7절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빌립은 이 사람들에게 조금씩 먹이더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값의 떡이 있어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이백 데나리온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성서학자들은 예수님 당시의 장정의 하루 품값이 ‘1데나리온’ 정도라고 하였으니 얼추 장정 이백 명의 품삯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떡도 부족할 것이라는 빌립의 대답이다.
8,9절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군중 속을 둘러본 ‘안드레’가 스승에게 말씀을 드린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누가 보아도 성인 한 사람의 한 끼니 식사감에 지나지 않는 양이다.
1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생활 사십 년 동안 식량이라곤 하나도 없었지만, 하나님은 이들에게 만나를 내려 먹게 하셨는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좋은 재료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람들로 무리지어 잔디 위에 앉게 하라고 이르시는데, 사람들이 무리지어 앉고 보니 그 수효가 약 오천쯤 되더라고 했다.
11절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예수께서 떡을 들어 축사하신 후 떡을 떼어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가 원하는 대로 주셨다.
성서 공부하는 우리는 깊이 생각 할 일들이 있다. 이렇게 ‘떡을 떼어 주신 것은 장차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에서 떡을 떼어 주실 것과, 십자가상에서 예수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자신의 손에 놓고 떼어 접붙임 하실 것을 상징으로 보여주신 것이라 하겠다.’
12절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날 떡을 떼어주신 것은 장차 다가올 접붙임의 상징으로 당신의 살을 찢어 나눠 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남은 떡을 버리지 말고 거두라고 하신 것이다.
13절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오천 명이 먹고 남은 떡 조각을 제자들이 거두니 열 두 바구니에 가득 찼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열둘은 완전수로써 이스라엘 민족 열두 지파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인류의 온 족속을 나타낸다고 보아도 상관없겠다.
14절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예수의 떡 기적을 본 유대인들은 놀란다. “세상에 저런 능력자도 있구나. 저 사람이야 말로 성경에 쓰여진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며 입들을 모았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단순한 떡 기적으로만 본 것이다.
인류역사에서 이 떡 기적을 바르게 읽은 사람은 유대인들 말고도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어거스턴이나 루터가 그랬고, 내촌감삼도 단순한 떡 기적으로만 보았을 뿐이다.
어느 분은 심지어 4절 말씀을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가기 위하여 군중이 가는 도중에 예수의 떡 기적이 있어 사람들이 5천명이나 모여들었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아니다. 십자가상에서 인류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살을 찢어 접붙임 하실 것을 미리 상징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오천 명이라는 숫자는 인류 모두를 나타내고 있다.
15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예수의 표적을 본 무리는 물질적인 것만 생각하여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를 임금으로 삼으면 우리가 먹고 사는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저희의 생각을 아시고 혼자 산으로 떠나 가셨다. 단 한 사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본 사람이 있었다면 산으로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다나엘이 1장 49절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하였을 때에 기뻐하신 것 같이 기뻐하시며 그들과 대화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예수를 알아 본 사람이 하나도 없어, 씁쓸한 마음으로 무리를 떠나 산으로 가신다. 떡 기적으로만 보는 것은 옛날 예수 그리스도 시대에나 지금이나 같다.
바보에게 보이신 십자가의 새로운 진리
바보는 왜 바보인가? 이해타산의 계산을 하질 못하므로 바보다. 이해타산을 못하는 사람이기에 하나님이 십자가의 새로운 진리를 보이신 것이다. 계산을 잘하는 사람은 새로운 진리를 깨달았다 해도 그 진리에 대하여 받을 공격이 두려워 발표를 못하기 때문에 보여주시지 않는다.
그러나 이해타산을 못하는 바보에게는 새로운 진리를 보이시여 말하게 하신다. 진리를 새로이 보게 되면 거침없이 말하는 바보이기에 택하신 것이다.
요즘은 바보들이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는 시대이다. 우직하게 자신의 깨달음을 말할 수 있는 그 사람이 바보이면서 새로운 씨앗을 이 땅에 심는 사람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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