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고 국희종선생님은 누구인가?

임중기 2016. 1. 2. 15:22

고 국희종 선생님은 누구인가?

 

 먼저 고 국희종 선생님을 “옥천향토문화연구회”에서 말씀드릴 수 있게 허락해주신 옥천 향토문화연구회에 마음으로부터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부족한 저를 이 자리에 소개해 주신 박상배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고 국희종 선생님의 문집을 보시고, 이분이 어떤 분일까 궁금해 하는 분이 많습니다. 저는 국희종 선생을 이야기하며, 늘 아프리카인의 아버지로 알려진 ‘슈바이처’ 선생을 이야기합니다. 슈바이처 박사와 국희종 선생님은 닮았습니다. 다른 부분이 있다면, 슈바이처 박사는 음악가로 음악공연을 하면서 아프리카의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하며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모아진 돈으로 병원도 짓고 하였는데, 국희종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오른손이 하는 봉사의 일을 왼손이 알 수 없게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1960년 9월에 복흥에 오셨습니다. 저는 그 때 열 살이었는데, 교회 주일학교에서 선생을 만나 오늘까지 스승님으로 존경합니다. 그 때 저희 가정은 참 빈곤하여 의식주를 선생님께서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저희 가족뿐만 아니라 비슷한 형편의 7, 8가족들도 늘 저녁을 함께 먹었습니다.

 

 선생님은 순창군 보건지소 의사의 수입을 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의식주로 제공하시고 치료하는데 사용하시었으며, 의사의 수입으로도 부족할 때에는 당신께서 점심을 굶으시거나, 고구마 같은 것으로 대신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가난한 사람들과 의식주만 함께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진리를 전하는 사역자로, 또 사회 윤리, 도덕의 교육자로 사셨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입은 저와 같은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선생님을 잊지 못하고 타지 생활을 하면서도 선생님과 계속 교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국희종 선생님의 의료 전도 봉사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새마을 연수원장을 역임하신 김준 선생은,

 “말만 풍성한 이 세대에서 자기희생을 통해서 사랑의 열매를 맺고 가신 분이 바로 내가 존경하는 국희종 선생님이다.” 중략

“국희종 선생은 광주의전을 나오신 의사로서 여수 애양원에서 봉사하시다가 가난한 산간벽촌의 불우한 농촌 청소년들과 같이 살기 위해서 우리 공동체 (복음농민의숙)에서 같이 생활하겠다는 것이었다.” 중략

 

 “그 때에 국선생께서는 복흥면 소재지에다 집 한 칸을 얻어 진료소 (보건지소)를 차리고 독신으로 자취하면서 수도자(修道者)적 생활을 하시면서 주일날 밤에는 20리 길을 걸어서 우리 공동체까지 오셔서 예배도 인도하시고 학생들 공부도 가르치시고 하셨다.

 국희종 선생을 생각하면 아프리카의 슈바이처 박사가 연상된다. 자기 개인의 부귀영화를 헌신짝같이 다 버리고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와서 가장 어려운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을 위하여 소리 없이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온유겸손하게 묵묵히 일해오신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때에 복흥에 뿌리진 씨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을 때 국선생께서 꾸준히 물주고 거름 주고 가꾸셔서 오늘날 여러 곳에서 여러 모양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한 알의 밀알의 상징이 국희종 선생이다.

날파리는 하루

꽃은 10일

권세는 10년

인생은 100년

예술은 1000년

사랑은 영원

국희종 선생께서 우리 가슴에 심어주신

사랑은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라고 회상하셨습니다.

 

 또 고려대 교육학과 명예교수인 김정환 선생은 “성서조선 명논설집”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전북 순창군의 오지 복흥면 정산리에 혜인의원을 세워 의료 전도 사업을 하는 한편 무교회 광주모임에서 발행한 ‘광주기독의사 회보’는 선생의 믿음과 삶의 기록이다.

 이분이야말로 또 하나의 한국의 슈바이처다 의사라는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어떻게 이렇게 성경연구를 해냈을까 놀랍기만 하다. (성서개요)에는 구약에서 아모스서와 오바다서, 신약에서 요한일서 빌립보서 에베소서 히브리서 그리고 갈라디아서 연구 개요가 담겨 있다.

 그는 또 1981년 8월부터 만 4년 동안 야나이하라 (矢內原) 선생의 ‘사무엘서 강의’ 를 변역하여 신앙월간지 (성서신애)에 연재했고, 자신의 ‘이사야서 강해’ 를 ‘광주기독의사 회보’에 1986년부터 만 2년 동안이나 연재하기도 한 열성가이기도 했다.” 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서강대학교 사학교수인 백승종 선생은, 국희종 선생님의 글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 개인적 경력, 민족적, 국민적 소속, 의식적 제도적 율법, 및 도덕적 율법, 이 넷은 모두가 의상입니다. 개인적 경력은 민족적 자랑과 결부되고, 민족적 자랑은 의식적, 제도적 율법과 불가분이고.... 다시 말하여 이 넷은 서로 관련해서 사람의 본체를 싸는 의상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네 의복을 입고 세상에서 뽐내고 꾸며대고 생활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서면 하나하나 다 벗겨지고 맙니다.... 이렇게 해서 벌거벗은 인간에게 ‘이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라고 물을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답은 나는 참으로 죄인의 괴수로구나!’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서면 우주에는 하나의 큰 신음이 가득 차 있는 것이 들립니다. 무엇을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까? 인간의 죄입니다. 이 죄라는 것을 처치하지 않는다면 적극적인 선한 일은 무엇 하나 시작되지 못합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인생의 어떠한 문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사회 구제, 국가 부흥의 희망도 없습니다.” 소개하고 있습니다.

 

 백승종 선생은 자신의 저서 ‘그 나라의 역사와 말’이란 책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국희종 선생이 이렇게 말했을 때, 그는 이찬갑, 함석헌, 김교신, 조만식, 안창호, 이승훈 등과 한 무리를 이룬다.”

 

 누구나 이러한 말을 할 수 없음을 알게 된 백승종 교수는 국희종 선생님을 이 민족의 대 스승에 자리에 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찬갑, 함석헌, 김교신, 조만식, 안창호, 이승훈, 국희종 선생은 본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오늘도 살아서 우리들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고 국희종 선생에 대하여 알고자 한 것도 선생의 높은 삶을 배우기 위함이라 생각합니다.

 

 1999년 5월 8일 선생은 소천 하셨습니다, 국희종 선생의 제자들, 박동래, 조동희, 엄태현, 김명술, 국신동, 임중기 등이 선생님의 의료전도 봉사생활을 이대로 잊혀지게 할 수 없다, 하여 국희종 선생의 신앙문집 발간위원회가 발족되어 선생께서 쓰신 글을 모아 2000년부터 신앙문집을 발간하였습니다. 그 후 선생님 추모기념모임 일에 맞추어 해년 한권씩 신앙문집을 발간하여 9권이 나왔습니다. 앞으로 2-3권 더 발간하고 전집으로 발간할 것입니다.

 

 복흥면에서는 선생이 소천 하신 10여년 만에 복흥면 전 면민이 마음을 모아 국희종 선생의 봉사 의료전도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2010년 5월 5일 송덕비를 세웠습니다.

 

 이제 고 국희종 선생은 복흥면민의 선생님일 뿐만이 아니고, 백승종 사학 교수의 말과 같이 이찬갑, 함석헌, 김교신, 조만식 안창호, 이승훈, 선생과 같이 국희종 선생을 민족사적 인물로 존경하여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세계적인 봉사의 인물! 슈바이처와 같이 세계인의 인물로 존경하여야 할 선생님으로 생각합니다.

 다시한번 옥천향토 문화 연구회에 감사를 드립니다.

 부족한 사람의 말을 들어 주시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