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요한복음 공부 제45과>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는 선한 목자
본문 말씀 10:1∼21
본문 분해
1,2절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
3절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불러 인도한다
4절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라 온다
5절 양들은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여 따르지 않는다
6절 비유의 말씀을 저희가 깨닫지 못하다
7절 나는 양의 문
8절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모두가 도적
9절 나를 통하여 들어가면 구원을 얻는다
10절 내가 온 것은 새 생명을 얻게 하려 함
11절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12,3절 삯군은 양을 돌보지 않는다
14,5절 선한 목자
16절 다른 우리의 양들도 인도하여 낼 것이다
17절 내가 목숨을 얻기 위해 목숨을 버림
18절 아버지에게서 받은 권세
19절 유대인 중에 분쟁이 일어나다
20절 왜 귀신 들린 자의 말을 듣느냐?
21절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겠느냐?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는 선한 목자와 양들!!
요한복음 공부를 처음 시작하면서 “인류 역사에서 어느 누구도 요한복음을 바르게 공부한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이 주장은 6장에 있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는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오늘 공부하는 10장의 “죽음의 문”도 포함된다고 하겠다(요한복음 공부 중에 앞으로도 이와 같이 주해하지 못한 부분이 많이 있음).
오늘 공부에서는 1절과 9절에 두 문이 나온다. 예수께서는 1절에서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목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양을 위하여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거짓 목자란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만이 양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기 위해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신다’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우리’란 둘레 곧, 울타리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넓은 의미로는 무리의 의미도 있다고 하겠다. 곧 인류를 ‘우리’ ‘무리’로 표현하셨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 속’에 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무리를 이루는 인류를 위해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신다는 말씀이다. 바꾸어 말하면 양을 위해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으면서 양의 목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많이 있었으나 이들은 진정으로 선한 목자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인류에게 새 생명을 주시려고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죽음의 문’을 피하여 울타리를 넘는 사람은 참 목자가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신다는 말씀이다. 선한 목자가 아니라면 누가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겠는가?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자신만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양들도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야 구원이 있다고 하신다. 양이 들어가는 문이 두 번째 문이다. 9절의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에서 ‘누구든지’는 인류-곧, 양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을 문이라고 하신다. 이 문은 무슨 문인가? 죽음의 벌판을 돌아다니는 양떼인 인류도 죽음의 문을 통과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죽을 때에 인류라고 하는 양도 같이 죽는다는 말씀이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에서 ‘나로 말미암아’란 무슨 말인가? 이는 ‘나를 거쳐서’라는 말씀이다. 참고한다면 日本語 성서에는 이 부분이 나로‘通って入る’ ‘나로 통해 들어오면’이라고 되어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예수 혼자 죽는 죽음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분명히 좌, 우에 강도가 같이 죽었다 그런데 그리스도敎 역사에서 강도의 죽음의 가치를 보지 못하고 <대속>이라는 大命題를 앞세워 그 틀, 그 논리에 맞추려다 보니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좌·우의 강도의 죽음은 간과한 채 대속으로만 생각하여 왔다. 대속의 신앙관(觀)으로 보면, 예수의 죽음과 강도의 죽음은 별개가 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는 접목으로 보면 강도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상에서 죽은 것이 참으로 진리로 다가오게 된다. 증언자 ‘바울 선생’은 위의 십자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강도가 함께 죽은 것을 로마서 11장에서 접목으로 증언하고 있다.
십자가상에서 좌, 우의 강도와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 예수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은혜를 입은 두 강도 중에서 한 강도는 예수께 의지-즉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고, 다른 강도는 예수께 의지하지 않음으로 추락하는 장면을 누가는 누가복음에서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누가복음 23:39-43).
예수께서는 죽음의 문에 대하여 비유(比喩)로 말씀하셨다. 왜 비유로 말씀하셨을까? 그것은 그 때에 바르게 말씀을 하셨더라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敎 역사 200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바르게 읽고, 바른 주해가 나오게 된 것이다.
본문 공부
1,2절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예수께서는 중요한 말씀 앞에 ‘진실로 진실로’를 반복하신다. 10장 1절의 말씀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양을 해치러 들어가는 도둑이나 강도는 우리의 울타리를 넘어들어가지만, 양의 목자는 우리의 문으로 들어간다는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이제까지 ‘양의 우리’에 들어와 하늘의 진리라고 떠들어댄 사람은 많았어도, 우리 안의 양-즉, 인류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란 말씀이다.
양의 우리-곧, 세상에 와서 외치는 자는 많았지만, 양을 위해 죽음을 통과하는 사람은 없었다는 말씀이다.
달리 말하면 히브리어에는 사람을 “adam”, 흙을 “adama”으로 표기하는데, 흙으로 지음 받지 않고 성령의 잉태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이 분 외에는 인류 구원자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없다는 말씀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자신만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는 者란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3절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이 절에는 문지기, 양, 그(목자)-이렇게 직분이 다른 세 부류의 무리가 나온다.
(1) ‘문지기!’ 문지기는 ‘그’를 위해 문을 여는 사람-즉, 예언자들과 세례요한 같은 사람들로, 이들은 예수께 공생애의 문을 열어드린 분들이라 하겠다.
(2) ‘양!’ 그(목자)의 음성을 듣는 ‘양’은 믿음이 있는 사람! 쉽게 이야기하면 나다나엘 같은 사람 또는 우리처럼 믿는 사람들이다.
(3) ‘그’ 그는 목자로서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말하고 있다.
4절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참된 목자가 하는 일들을 말씀하신다. 아침이면 목자가 양을 우리에서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은 주인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따라 가고, 따라 오고 한다는 말씀이다.
5절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양은 타인! 즉, 목자 아닌 사람의 음성을 알아듣질 못한다. 양들은 낯선 음성을 들으면 오히려 도망을 한다.
6절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 곧 문, 문지기, 양들이 그(목자)-즉, 예수 자신과 관련되어 있음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는 유대인들은 그 뜻을 알아듣질 못했다. 그러면 이때에 왜 비유로 말씀하셨을까? 그 때에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직접 말씀하셨더라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눈 앞의 일도 믿질 않는데 미구에 일어날 일을 누가 깨닫겠는가. 그것을 다 아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7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예수께서 선언하신다.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양의 문’ 목자의 인도에 따라서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는 문이라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곧, “나는 목자”라는 선언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우리의 목자인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이다.
8절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먼저 온 자’ 는 이제까지의 종교지도자로, 보인다. 그런데 왜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였던 선지자 선각자를 ‘절도요 강도니’하셨을까? 그것은 아담의 혈통으로 온 선지자라고 한 사람들도 알고 보면 ‘들포도나무’에 불가 하다는 말씀으로 읽으면 좋겠다. 오직 인류에게 새 생명!!! 곧 “하나님의 품속에 있다” 성령의 잉태로 온 자신 만이 인류에게 새 생명을 주는 것을 분명히 하신 말씀으로 보인다.
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내가 문이다!’ 여기서의 문은 7절에서 선언하신 ‘양의 문’이다. 하여 양-곧 우리가 예수라는 문으로 들어가면 구원을 얻게 되고, 그 문을 드나들며 영원한 양식인 꼴을 얻게 된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상에서 좌, 우의 강도!! 의 모습으로 인류가 믿음으로 죽으면, 예수의 흘린 피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가 3일 만에 부활 할 때에 믿음으로 죽었던 그리스도인이!! 예수의 부활을 힘입어 그리스도의 흘린 피의 생명으로 부활 신앙으로 하늘 백성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룬 십자가상의 진리를 진리의 양식으로 영원히 산다는 말씀이다.
10절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도적-즉,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자칭하는 자들은 울 안의 양들을 탐하고, 양들을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온 것은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흘린 피로 양들에게 생명을 얻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곧 9절의 ‘나로 말미암아, 또는 나와 같이 죽으므로 생명을 얻게 하신다’는 말씀에 이어지는 말씀이다.
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선한 목자는 양들의 생명을 개조(改造)하기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다는 말씀으로,“나는 너희에게 새 생명을 주기 위하여 목숨을 버릴 것”이라는 뜻이 들어있는 말씀이라고 하겠다.
12,3절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죽기도 하지만, 그러나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다. 그래서 삯군은 이리가 오면 서둘러 달아나고, 이리는 양을 늑탈한다. 즉, 자신들에게 이익이 없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양들을 버린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삯군은 소위 종교지도자를 자처하는 도적들이다.
14,5절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께서는 “나는 목자라서 내 양을 알고 양들도 나를 아는데(14절),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15절)고 하신다.
곧 하나님이 예수 안에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안에 계셔 하나인 것과 같이, 예수가 양에게 새 생명을 주기 위해 죽는다는 말씀이다. 양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으면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양과도 하나라는 말씀을 하신다.
16절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도 내개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이란 무슨 말씀인가? 정말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그 시대의 사람이 아닌-과거의 사람과 미래의 사람을 아울러 그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본다. 여기에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을 포함한 온 인류라고 하겠다.
17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신 이유를 설명하신다. 여기서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는 무슨 말인가? 그리스도라는 참포도나무가 인류라고 하는 들포도나무를 참포도나무로 변화시키기 위한 접붙임에 쓰일 진액을 주기 위하여 피를 흘려 죽는다는 말씀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양들에게 자신! 곧 하나님의 생명을 주어 온 인류의 목숨! 생명을 얻기 위하여 죽는다는 말씀이다.
18절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하신다. 이어서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고 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는 부분이다. 바꾸어 읽으면 ‘아버지의 뜻으로 이 일들을 한다’는 말씀이다. 곧, 농부인 하나님 아버지가 당신의 포도농장에 참포도나무는 한그루도 없고, 들포도나무만 무성함을 보시고 이 농장의 들포도나무를 참포도나무로 바꾸신다는 뜻이 들어있다.
19절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이제까지의 예수 말씀에 대하여 듣고 있던 유대인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이는 마치 예수께서 하신 ‘내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는 말씀과 같이 분쟁이 일어났다. 어디서나 「참」이 들어가면 분쟁이 일어나는 모양이다.
20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예수의 말씀을 듣던 유대인들 중에 많은 사람은 ‘저 사람 예수가 귀신들려 미쳤거늘 왜 그의 말을 듣느냐?’고 힐난한다.
21절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미친 예수의 말을 왜 듣느냐?’는 말에 대하여 소수의 사람들이 말한다. ‘예수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다’고 하면서 오히려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고 반박한다.
==========================================================
요한복음 공부 발표 2013년 3월 10일 (비매품)
E-mail : imjoongki@hanmail.net http://cafe.daum.net/1000wooo
電話 010-6346-3736 요한복음공부 발표인 임 중 기
==========================================================
'요한복음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0) | 2013.05.09 |
---|---|
바람으로 계시는 創造主 하나님 (2) (0) | 2013.04.09 |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죄 (0) | 2013.02.10 |
소경 되었던 사람, 바리새인과의 논쟁에서 우위에 서다 (0) | 2013.01.14 |
유대교의 월권!! 출교(黜敎) (0) | 2012.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