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공부

베데스다 연못 곁에서 일어난 기적 이야기 (하)

임중기 2011. 1. 12. 18:43

<요한복음 공부 제21과>

베데스다 연못 곁에서 일어난 기적 이야기(하)

본문 말씀 5:9∼18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避)하셨음이라.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甚)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본문 말씀 분해

9절, 안식일의 병 고침

10절, 유대인들의 훈계

11절, 병자의 변명

12,3절 그가 누구냐?

14절,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15절, 나를 고친 이는 예수

16절, 유대인들, 예수를 핍박하다

17절, 예수의 답변

본문 말씀 공부

9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8절에서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에 병에서 나은 사람이 자리를 들고 걸어간 날이 마침 안식일이었다. 율법에는 안식일에 일을 하면 안 되는 것으로 되어있다.

10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유대인들은 율법에 얽매여 있어 안식일 날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조차 일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일날의 일은 옳지 않다고 한 것이다.

11절 “대답(對答))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 대”

안식일 날 일한다고 훈계하는 유대인들에게 병 나은 사람이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고 변명을 한다. 힘없는 병자 자신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12,3절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유대인들이 병고침 받은 사람에게 물었다.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한 사람이 누구냐?’고. 병자는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하였다. 이는 예수께서 여러 사람들 앞에 자신의 존재를 알릴 때가 아직은 아님을 아시고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기 전에 벌서 자리를 피하셨기 때문이다.

14절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甚)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예수께서 얼마 후에 병 고침을 받은 병자를 만나게 되어 말씀하셨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여기서 우리 공부하는 사람에게 큰 문제가 생긴다.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모든 병은 죄로부터 오고, 죄는 욕심이 과하여 짓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병)을 낳느니라.”(약1:15)

15절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병고침을 받은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자기의 병을 고쳐준 능력자를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고, 뒤에 예수를 만나게 되자 자랑하게 된다. “나를 고쳐준 이는 예수”라고. 그러나 이 말은 결국 유대인들에게 고변한 말이 되고 만다.

16절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핍박하게 된 이유가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안식일에 말씀하신 ‘너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한 마디 때문에 핍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있을 수 있는 일들인가? 마치 우물 안에만 사는 개구리의 시각이다. 율법에 쓰여진 글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각 말이다. 율법의 우물 안에서 시각을 밖으로 돌려야 새로운 진리! 새로운 성서의 지평선이 보이게 된다.

17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예수께서는 율법이라는 우물 안에서만 사는 유대인들에게 시각을 돌려 하늘의 아버지를 보라고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 한다’고. 유대인의 시각을 땅의 율법에서 하늘나라 아버지에게 돌리려 하신 말씀이다. 즉, ‘율법만 보지 말고 얼굴과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께 돌려 보라’고 하신 것이다. “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인류 구원을 위하여 일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나도 인류 구원을 위하여 단 한 사람이라도 낫게 하려는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생히 들려온다.

18절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同等)으로 삼으심이러라.”

율법을 써진 글자대로만 수호 하겠다는 유대인들에게 하늘의 아버지를 가르쳐 주심으로 유대인들은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죽이려 하게 되었다. ‘예수가 율법만 범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신을 하늘의 아버지와 동등이 하려 한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하나님의 품속에 계셨던 분으로, 하나님의 본체라고 할 수 있는 분이다. 즉, 우주 만물의 창조자 되시는 분이시다.

오늘 공부에서 본 것처럼 율법! 대속! 또는 속죄! 라는 고정 관념을 깨야 새로운 진리가 보인다.

‘율법’이라는 고정관념

우리 속담에 ‘우물 안 개구리’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식견이 넓지 못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바꾸어 말하면 우물 안의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뛰쳐나와야 넓은 하늘과 광활한 대지(大地)를 본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유대인은 ‘율법’이라는 우물 속의 고정된 관념을 뛰어 넘어야 새로운 진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율법이라는 고정 관념 때문에 새로운 기적을 보지 못하고 38년 동안 누워 지내던 병자가 만물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한 마디 말에 벌떡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병자. 창세(創世) 이후 처음으로 일어난 기적을 보지 못하고 율법적으로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는 것에만 주목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불행한 생각인가? 이러한 일들은 율법이라는 고정 관념 때문에 새로운 기적을 보지 못하는 맹인들이 하는 일들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있다. 기독교에서 자신들이 최고라고 자랑하는 무교회에서 조차도 새로운 성서 해석을 백안시(白眼視) 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다. 기독교에서 구원의 진리로 말하는 대속! 속죄의 신앙만이 인류역사에서 유일한 진리로 보고, 다른 사람의 새로운 진리 발견을 백안시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만약 대속의 진리가 인류역사에서 유일한 진리라고 한다면 종교가요, 세계적인 시인인 ‘존 밀턴’이 어찌 “제2의 개혁 제3의 개혁”을 이야기했겠는가.

개혁을 말한 사람은 밀턴 뿐만이 아니다.

내촌 감삼우주적 최대문제」라는 글에서 “웨슬리나, 칼빈이나, 루터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바울, 베드로, 요한에게 다시금 생명의 본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가라” 하였다.

노평구 선생도 “제2의 개혁 제3의 개혁”에 대하여 자주 말씀하셨다. “제2의 개혁, 제3의 개혁은 우리 한국 사람이 해야 한다”고 수 없이 역설하셨다. 그리고 이런 말도 하셨다. “한국 사람이 세계역사에 이바지 할 수 있는 것은 제2, 제3의 진리 발견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인이 진리 발견을 하여야 한다.”고 하셨다. 이렇건만 새 진리발견이라는 깃발을 든 사람을 백안시하고, 모임에도 나오지 못하게 막고 있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예언자 이사야! 십자가상에서 인류에게 당신의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 증언자 바울 선생! 등을 완전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아니다. 맹인들이 코끼리의 한 부분만을 만져보고 코끼리를 평가하듯 증언자 바울 선생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고백하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무슨 책인가? 성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갈라디아서를 가리켜 “신앙을 지키는 칼” 또는 “신앙의 전투서” 라고 한다. 바울은 이 전투서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하고 있다.

증언자 바울 선생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대속으로 보았다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죽었다고 고백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속은 예수 그리스도만 죽고 바울은 죽지 않아야 대속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죽었다고 고백한 것이다. 이 말은 어거스틴이나 루터 등 개혁자들이 대속으로 본 것일 뿐, 바울 선생이 그렇게 본 것은 아니다. 바울 시대로 돌아가 대속의 틀을 벗어난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십자가의 진리가 발견 될 수 있는 것이다. 대속 이라는 우물 안에서 뛰어 넘어야 광활한 성서 안에서 새로운 지평선의 진리가 보이게 된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다시 사는 모든 형제자매님께 하나님의 은총이 늘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요한복음 공부 발표 2011년 1월 10일 (비매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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