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공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예수님(3)

임중기 2010. 10. 11. 19:02

<(新)요한복음 공부 18>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예수님(3)

본문 말씀 4:27∼45

“이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랴.’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은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거 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 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인류 구원자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늘의 진리! 우주 만물의 창조자를 만나면 누구든지 자신의 부모 형제나 이웃에게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게 됩니다. ‘빌립이 나다나엘 에게 와 보라’ 한 것이나(요2:46),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이 분이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며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가 외친(요4:29) 것은 기쁜 소식을 전한 공통점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 ‘인류 구원자’ ‘그리스도’ 라고 할 때에 구원이라는 의미가 대속의 신앙관(信仰觀)과 영접으로 이루어지는 접목(接木)의 신앙관(信仰觀)이 각각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대속 신앙의 구원관;

아담의 죄악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인 나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죽었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된다는 구원관.

접붙임 신앙의 구원관;

아담의 죄악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인 나를 품종(品種) 개량(改良)함으로써 얻어지는 구원관.

대속의 신앙관이나 영접을 전제로 하는 접붙임의 신앙관 모두가 믿음으로 구원 된다는 것은 같습니다. 여기에서 믿음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은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인류는 아담의 자손으로, 모두가 죄인인 ‘들포도나무’입니다 오직 인류 역사에서 한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포도나무로 우뚝 서 계시는 것’입니다(요15:1).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인류를 대표하는 두 강도도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도 죽이셨습니다. 증언자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강도의 모습으로)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참 포도나무 가지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肉體)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가지의 생명을 주기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갈2:20)이라고 하였습니다.

증언자 바울은 이렇게 십자가의 죽음을 ‘접붙임의 만남’으로 보고 이것을 새로운 창조(新 創造)로 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新 被造物)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여기에서 ‘이전 것’은 ‘들포도나무 시절’을 말하며, ‘새것’은 참포도나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말씀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상에서 같이 죽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다시 사는 품종 개량의 구원관(救援觀)입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오늘 공부하는 요한복음 4장 36절에서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농부이신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두 강도를 인류의 대표로 세워 ‘들포도나무’ 둥치를 절단하여 죽이고, 아들 예수로 하여금 생명의 진액을 흘려 절단 된 들포도나무 둥치에 ‘접붙임 하려고 피와 물만’ 흘리며 죽게 하신 것입니다(요한19:31-36).

접붙임의 신앙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된 상태에서 본디(本)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일들입니다. 즉, 에덴에서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以前)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 하늘 백성이 되어야 되돌아 갈 수 있고(요3:3), 거듭나려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야 그 힘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을 영접 또는 접목의 만남으로 보는 이유입니다. 에덴! 천국으로 되돌아가는 길이 되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한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1)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접붙임으로 거듭나 하늘 백성이 되었으니 그리스도는 나의 하늘가는 길(道)입니다.

(1)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접붙임 받아 거듭나는 것이 내가 다시 사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나의 진리(眞理)가 되십니다.

(1)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접붙임 받아 거듭나는 것이 생명을 받는 것이니 그리스도는 나의 생명(生命)이 되십니다.

증언자 바울은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能力)이 하나님께 있음이라”(롬11:23)고 하였습니다. 들포도나무가 접붙임을 받아 참포도나무, 작은 예수로 사는 것이 인류창조 당시의 모습으로 회귀(回歸)하는 인류 구원이라는 말씀입니다. 땅에 속해있는 죄 많은 내가 품질 개량으로 하늘 백성이 된다는 구원론입니다.

본문 공부

27절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동네로 먹을 것을 사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왔을 때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하고 계셨는데, 제자들은 이것을 이상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하느냐고 스승에게 질의하는 제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의 스승에 대한 신뢰가 어떠했던가를 알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를 경원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니 다정하게 대화를 한다는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스승을 이상하게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28절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와 대화를 나눈 사람이 그리스도란 것을 깨닫게 되자 동네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겠다는 충동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가서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29절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랴’ 하니”

동네에 들어간 여인이 외쳐 말합니다. ‘나의 과거에 행한 모든 일을 내개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 분이야 말로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며 급히 전한 것입니다.

30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여인이 전하는 말을 듣고 온 마을 사람들이 예수에게 나왔습니다. ‘도대체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생긴 사람이기에 저리 호들갑을 떠는고?’ 하는 호기심도 작용했을 것이며, 유대인들처럼 그리스도의 출현을 학수고대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이었으니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31,2절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로 들어가고, 마을 사람들이 예수에게 오는 사이에 제자들은 자기들이 구해온 음식을 내놓으며 “선생님 잡수소서.” 하니 예수께서는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하십니다. 스승의 이 말씀에 제자들은 궁금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3,4절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궁금해진 제자들이 “누가 먹을 것을 갖다 드렸는가?” 의아해 할 때 예수께서는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늘의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그 전해지는 일을 하므로 육의 시장함을 알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진정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늘의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이야 말할 필요가 없지요. 인류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죽기까지 하신 예수님입니다.

35절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당시에는 밭에 씨앗을 뿌리고 넉 달이 지나야 추수를 할 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에서 ‘너희’는 제자들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일반 대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갈수록 제자들이 못 알아듣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 추수를 말할 때 제자들은 밀 같은 곡식을 두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인류의 밭-세상 인간들을 두고 한 말입니다. 비유로 말하면 ‘들포도나무’만 무성한 인간세상을 본 것입니다. 인간세상의 무성한 ‘들포도나무를 베어 내고, 참포도나무를 접붙임 할 때가 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계절로 말하면 봄이 채 오기 전, 나무에 막 물이 오르려 할 때입니다. 상징적인 ‘추수의 때’를 뒤집어 생각하면 접붙임의 때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36절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거두는 자가 이미 삯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기서의 삯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말합니다. 인류를 새롭게 하시는 사명입니다.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인류가 영생에 이르게 일을 지금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36절을 일본어 성경(신 공동번역)에서 살펴보겠습니다.

“刈り入れる人は報酬を受け 永遠の命に至る実をあっめているこうして 種を蒔く人も刈る人も共に喜ぶのである”

- 거둬들이는 사람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의 단계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다. 이와 같이 씨를 뿌린 사람도 거두는 사람도 같이 기뻐한 것을 보고 있다. -

그런데 중요한 것은 “永遠の命に至る実をあっめてい” -영원한 생명의 단계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다-입니다. 여기서도 더욱 중요한 것은 ‘至る’ 이르다 인데 어떤 단계에 이르다 즉, ∼∼에서 ∼∼에 이르다 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영혼’의 비유로 열매를 들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형태로 읽을 수 있습니다.

(1) 땅에 속한 사람에서 하늘에 속하는 사람으로 이르다.

(1) 아담의 자손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이르다.

(1) 어떤 단계에 이른 열매를 모으다 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처음 창조 때에 창조주와 지금 인류를 새롭게 하시려고 오신 분이 다 같이 함께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인류를 새롭게 하시는데 함께 즐거움으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37절 “그런즉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은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앞절의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 한다는 말씀과 같은 맥락의 말씀으로 창조자와 접붙임을 하는 자가 시간적 공간이 있을 뿐, 같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38절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창조자요 우주 만물 운행자가 노력하였고, 또는 접붙임 하시는 농부가 노력하였는데, 너희 즉 우리는 그 분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다는 것입니다. 다 이루어 놓은 일들을 전하는 자-전도자는 다 이루어 놓은 것을 전하는 참여자들입니다.

39절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 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 여인도 참여자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도자로 섰습니다.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증거 하므로 그 동네 안의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었다고 하였습니다. 전도자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이 인류를 새롭게 하시는 일들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40절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메시야! 인류를 새롭게 하시려고 오신 분을 만나게 된 것이 참으로 반가워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였고, 예수님 일행은 거기서 이틀을 유하셨습니다. 하늘 나라백성은 그 사람들과 지내는 것을 참으로 좋아합니다.

41,2절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전도자의 사명은 ‘와 보라! 와서 깨달음의 말씀을 들어보라!’고 전함에 있을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 여인의 외침을 듣고 호기심으로 예수께 나왔지만, 예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여인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라고 말입니다.

43,4절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거 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사마리아 동네에서 이틀을 묵은 예수님이 고향 갈릴리로 가시며 증거 하십니다. 일종의 심경고백입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렇게 나를 영접하며 믿는데 고향 사람들은 기적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데에 섭섭한 마음을 드러내 보이는 말씀을 하십니다. 선지자 보다 더욱 크신 창조주이신데 알아주지 못함에 대하여 슬픔 마음을 드러내 보이고 계십니다. 창조자를 알아보지 못한 고향 사람들입니다.

45절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 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45절은 44절에 예수께서 증거 하신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에 요한이 덧붙임 하는 말씀으로 생각이 됩니다. 갈릴리의 유대 사람들은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을 보였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았는데, 유대인들이 멸시하고 상종(相從)조차 하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은 기적을 보지도 않았어도 예수를 영접하였다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45절을 기록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하늘의 복음! 그리스도의 십자가복음은 가난한자에게 먼저 전해지고, 또는 멸시를 당하고 천대를 받는 사람들이 먼저 믿게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명절에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욱 복되다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요?

우리 말 중에 ‘열길 물속은 알 수 있어도 한 길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신앙은 더욱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의 신앙을 가볍게 비판하는 이들은 사람의 존귀함을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무지의 소치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敬畏)한다고 하면서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자신의 주관으로 함부로 다른 사람을 제단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