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공부

세례는 예수와 인류의 만남의 상징

임중기 2010. 7. 11. 21:51

<요한복음 공부 14>

세례는 예수와 인류의 만남의 상징


본문 말씀 요한복음 3:22∼30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 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 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본문 말씀 분해

 22-23 예수와 요한이 세례를 베풂

 24-25 요한의 제자와 유대인의 변론

 26-27 요한의 제자의 보고와 답변

 28-29 너희가 증거 하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리라


세례의 의미

 기독교인들 대부분은 세례(洗禮)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로 죄를 씻는 의식쯤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없애기 위하여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씻어 낸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세례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것은 증언자 바울 선생이 로마서에서 참으로 명쾌하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6:3-7)

 

바울은 십자가의 사건 자체를 ‘세례’로 보고 있습니다. 즉,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흘린 피와 인류의 만남 자체를 ‘세례’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죄에 대하여 죽고, 예수가 부활할 때에 우리도 하나님의 의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나도,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부활을 믿는 것이 세례요, 신앙입니다.


 증언자 바울은 직접적으로 십자가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6: 6절)

 바울은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예수와 같이 죽었다고 역설하는 것입니다. 우리-아담의 자손이 죄로 죽고, 물속에 들어갈 때는 나 자신이 들어가 죽고, 물에서 나올 때는 하늘의 생명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접붙임” 받아 부활하여 산다는 것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즉, 세례는 예수의 생명과 인류가 만나는 상징인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 역시 자신이 주는 세례의 의미를 높이 평가하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예수)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요한1:31)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태3:11)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의 회심이 세례다

 세례는 바울의 회심의 과정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 5∼18” 기사에서 “바울과 예수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세례요, 회심을 이야기하는 기사입니다.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나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 하니라.”

 이 기사에서 바울은 “주여 누구시나이까?” 하며 물은 후로는 말이 없습니다. 예수의 말씀 또한 6절에서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는 말씀 외에는 모두가 바울 선생의 행보에 관한 기사입니다 여기서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 하였다.”는 기사를 주목하면 이는 곧 ‘예수의 령’‘바울의 마음속’ 즉, 바울의 영혼 안에 들어가 싹이 트는 시간적 공간이 바로 사흘입니다. 싹이 트고, 그 싹이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시간적 공간이 사흘이었던 것입니다. 이 공간에서 성령의 감동 감화로 예수를 자신의 생명으로 영접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후로 ‘아나니아’라는 예수의 제자의 말씀을 듣고 확고히 신앙인으로 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회심의 과정이 바로 세례의 과정입니다.


 이리하여 회심 전의 「사울」에서 회심 후에는 「바울」이 되였던 것입니다. 즉 물에 들어갈 때(세례)는 아담의 후손 사울이었고, 물에서 나올 때는 새로운 피조물(被造物)인 그리스도의 생명을 접붙임 받아 산 것(고후5:17)입니다. 즉,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소위 성직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십자가 사건의 그림자에 불과한 세례를 전매특허를 낸 것처럼 세례를 행사한다면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세례는 특정 종교 지도자-곧 목사나 신부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례는 신앙적으로는 “나” 안에서 나와 예수 그리스도가 1대1의 관계에서 회심을 이루는 것이 참 세례입니다.

 그리스도인 자신이 마음으로

 “주여! 당신을 나의 생명으로 영접하나이다. 이제 저의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 지금부터 당신은 나의 왕이 되시나이다.”

하는 마음의 고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세례입니다. 한마디로 ‘신앙 고백’입니다. 신앙 고백은 많은 청중 앞에서 “사도신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께 하는 고백입니다.


본문 공부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요한은 복음서 기록을 순서가 있게 기록하였다고 11과에서 공부한 바 있습니다만, “거듭남” 또한 공부하였습니다.

 12과에서는 “성령의 역사”를

 13과에서는 “우주 만물 창조자(創造者)가 놋뱀처럼” 매달리고

 14과 즉, 이번 공부에서는 세례를 중심으로 인류 구원의 상징인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와 인류의 만남」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22절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악을 행하는 자는 빛을 미워하고,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온 다” (요한복음 3:20,21)는 가르침 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는 모습입니다.

 

 23절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유대 땅에서 예수가 세례를 주신 그 시기에 요한도 물이 많은 애논이란 곳에서 세례를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4절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이때는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기 전입니다. 요한이 옥에 갇히고 나면 요한의 시대가 끝나게 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25절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요한의 제자들과 한 유대교인이 결례(潔禮)에 대하여 토론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결례는 몸을 깨끗케 하는 의식, 즉 세례를 말하고 있습니다. 기사에 나오는 유대인은 이런 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너희 스승에게서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야로 증거를’ 받은 사람이 저쪽 유대 지방에서 세례를 주고 있는데, 도대체 그 사람은 무슨 자격으로 세례를 주느냐고 보느냐 하며 토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26절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 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유대교 사람과 세례요한의 제자가 요한에게 와서 예수가 베푸는 세례의 현장(現場)을 설명합니다. “선생님(랍비)! 선생님께 증거를 받고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者), 곧 선생님이 증거 하시던 자가 선생님처럼 세례를 주는데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절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세례를 주는 현장 소식을 전해들은 요한이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사람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 이루어 놓은 것을 믿는 믿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28절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 할 자는 너희니라”

“나의 말한 바”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 그리스도는 나에게 증거를 받은 분이지만, 나는 다만 그의 앞을 예비하기 위하여 온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증거 할 자는 너희니라” 그러니 위의 사실 즉, 요한 자신은 예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임을 증거 하라는 제자들에게 당부입니다. 참으로 세례자 요한의 증거자로서의 위대를 보는 것입니다. ‘증거 하라’는 말 속에는 ‘그리스도는 오직 예수’라는 것을 증거 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29절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혼인식장에서 신부를 취하는 사람은 신랑이지만, 신랑 옆에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신랑보다 더 기뻐하기 마련입니다. 요한 자신은 예수의 친구로서 그리스도 오시는 소리를 듣고 시기가 아닌, 기쁨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부를 취하는 자’란 혼인을 말하는 것이지만, 만남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혼인은 신랑과 신부가 만남으로서 부부와 가정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원초적 죄인인 우리 인간과 하늘에 속한 예수와의 만남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 만남에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도 같이 죽음으로써 개개인의 죄 된 몸은 죽고, 예수의 새 생명을 받아 산다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의 사건이 접붙임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접붙임은 사흘이란 무덤 안에서의 시간적 공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한2:19>는 말씀에서의 사흘이란 시간적 공간도 같은 맥락의 말입니다.

 

 증언자 바울은 고리도전서 15장 47,49절에서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形象)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지 못하면 하늘나라는 절대 갈수 없을 것입니다. 접붙임이란 방법으로 예수의 생명을 받아 예수와 하나 될 때에 하늘나라엘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와 하나 되기 위하여 왔다” (요한17:21-23)고 하셨습니다.


30절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그는-즉, 예수는 흥(興)하여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구원의 사업을 이루시려면 흥하여야 하겠고, 세례요한 자신은 예수를 인류에게 메시아 구세주 하나님으로 증거 하였으므로 쇠하여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일이 끝났음으로 죽음이 임박해 옴을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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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공부 발표 2010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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