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공부 11>
인류가 구원 받는 진리는 “거듭남”
본문 말씀 3:1∼6
“바리세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官員)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表蹟)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母胎)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聖靈)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肉)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령(靈)이니’”
본분 말씀 분해
1,2절 하나님께로서 오신 분
3절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조건
4절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5절 물과 성령(聖靈)으로 나지 아니하면
6절 육(肉)으로 난 것과 성령으로 난 것
인류 구원의 사업이 순서 있게 이루어지다
세례자 요한의 증거에 대한 답변으로 나다나엘은 요한복음 1장 49절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라고 예수께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2장 1∼11절에서 예수는 육의 모친인 마리아로부터 ‘나다나엘이 고백한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을 실증(實證)해 보이라’고 간절한 청함을 받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能力)”은 바로 예수에게서 나오는 기적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물로 만든 기적의 포도주를 여러 제자들이 함께 마시며 인류 구원의 길을 향한 출정식(出定式)을 열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피의 포도주를 마신 제자들이 출정식을 끝내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갑니다.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도착한 예수께서는 첫 번째 일로 요한복음 2장 13∼25절에서처럼 제자들과 함께 성전 확청에 들어가십니다. 장차 성전에서 행해지는 제사의 의미까지 없애는 성전의 완전 철거를 대비한 확청입니다.
그리고 오늘 공부할 3장 1∼6절에서는 인류(人類) 구원(救援)을 위한 새로운 진리(新眞理)의 기초(基礎)를 놓는 것입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서는 형식에 치우친 예루살렘의 성전을 철거하고 새 성전을 건립하여야 하는데-예수께서는 새로운 성전의 주춧돌이 될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거듭남’이 오늘의 공부입니다.
본문 말씀 공부
1절 “바리세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官員)이라”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유대의 관원입니다. 성전 안에서 장사꾼들을 내쫓고, 이적을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수를 유대인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시기하며 미워 할 때에(요2:14∼20) 예수를 이해하는 오직 한 사람의 관원이었습니다.
2절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當身)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表蹟)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니고데모가 왜 밤에 왔습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이 예수를 선생 또는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을 때이므로 예수와의 만남이 알려지면 비난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으로, 대 학자이며 그해의 의회(議會) 의원(議員)이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체면 때문에 밤에 왔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께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아들임을 알아보지 못 할 때에 니고데모는 알아보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니고데모는 예수에게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았습니다.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는 자신이 느낀 점을 말합니다.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은 아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오로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행할 수 있는 표적’이라고.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眞實)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세상 이치를 다 아는 사람처럼 말하였던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깨우쳐 줍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거듭남! 이 ‘거듭남’이 있는 사람만 하늘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듭남이 없으면 하늘나라를 볼 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기는 고사하고 볼 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거듭남’이란 말은 예수께서 처음으로 사용하신 말입니다.
이때까지 인류에게는 ‘거듭남’이란 말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서 최고의 지식층이라고 할 수 있는 니고데모가 알아듣지 못한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이 새로운 성전(聖殿)입니다. 이는 장차 이루어지게 될 “접붙임의 만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접붙임의 만남”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강도의 다리 꺾어진 곳에 흘러 들어와(요19:32) 접붙임 되어 새생명으로 거듭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거듭난 사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인류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사건을 “접붙임의 만남”으로 보는 이유입니다.
4절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母胎)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유대인으로 최고의 학자요, 의회(議會) 의원(議員)인 그가 거듭난다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날 수 있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5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聖靈)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예수께서는 중요한 말씀마다 머리말에 사용하셨습니다. 니고데모의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날 수가 있느냐”는 물음의 답에도 쓰고 있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물은 무엇입니까? 물은 말씀입니다. 말씀은 무엇입니까? 말씀은 생명입니다. “말씀이 육신 되어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요1:1,2)입니다. 때문에 그분의 생명을 접붙임 받아야 거듭남이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떡-즉, 그 분의 살과 피를 받아먹어야 거듭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十字架)상에서 흘린 피를 받아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사는 “거듭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령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실 때에 흙으로 당신의 형상(形象)을 만들고, 그 형상(形象)에 당신의 생기(生氣)를 불어넣었는데 그 생기-곧, 하나님의 기운이 성령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6절 “육(肉)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령(靈)이니”
“육(肉)으로 난 것은 육이요” 아담의 자손은 모두 육에 속한 죄인이요, 그래서 인류는 모두가 죄인이란 말입니다.
“성령(聖靈)으로 난 것은 령(靈)이니” 비록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기운 즉,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권세를 받은 하늘나라 백성이란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아담의 자손은 모두가 죄의 자손-곧,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죄(罪)의 자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육의 죄를 없애는 죽음에 동참함으로 죄에 대하여 죽고, 죄가 죽어 없는 곳에 예수 그리스도가 흘린 피로 접붙임 되어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사는 것이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창조의 생명입니다.
대속과 접붙임의 비교
인류 구원의 주춧돌과 같은 “거듭남”은 어디에서 온 말입니까? 그것은 “접붙임의 만남”에서 온 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사건을 대속이나 속죄의 사건이 아닌 접붙임의 사건으로 보는 이유입니다.
‘대속’은 천년을 연구하여도 ‘거듭남’이란 말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접붙임’은 ‘거듭남’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집니다.
‘대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데에 관계가 많지 않은 말입니다.
그러나 ‘접붙임’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접붙임’은 ‘거듭남’과 관계가 밀접한 말로, 접붙임이 있어야 거듭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속’이란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나는 참포도나무, 너희는 가지, 내 아버지는 농부”란 말씀이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건을 접붙임으로 볼 때에 위의 말씀이 논리가 성립됨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접붙임 받아야’ 하나님 자녀로서의 권세가 주어집니다(요1:12).
로마서 6장 11절에서 증언자 바울 선생은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自身)을 죄(罪)에 대하여는 죽은 자(者)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바울 선생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하여 강도의 모습으로 죽었다고 보았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다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좌우편 강도가 같이 죽었는데, 너희도(우리도, 여러분도, 나도) 강도 한 사람, 한사람으로 죽었다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죄로 죽고, 의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접붙임 받아 살았다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안에서’가 일본 성경에는 우리 성경과는 사뭇 다른 뜻이 있습니다. 이 ‘안에서’라는 대목을 일본어 성서에서는 ‘結ばれて’(무스바레데)로 쓰고 있는데, 그 뜻을 살펴볼까 합니다.
일본어 성서 신 공동 번역에는 아래와 같이 되어있습니다.
“このようにあなたがたも 自分は罪に対して死んでいるが キリストイエスに結ばれて 神に対して生きているのだと考えなさい” 여기서 중요한 것은 ‘結ばれて’ ‘무스바레데’인데 그 뜻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어떤 관계가 맺어지다,
1. (남녀가) 육체(肉體) 관계를 갖다
1. 결혼(結婚)하다
위의 의미들을 묶어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결혼해서 산다’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무스바레데’는 ‘접붙임의 만남’이 되는 것입니다. 위에서 본 것과 같이 대속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의 마음속 깊이 들어와 계심을 이야기 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나와의 결혼입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생명과 생명이 맺어지는 만남-곧, 접붙임의 만남으로 본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로마 병정으로 하여금 “강도의 다리는 꺾고, 예수의 다리는 꺾지 않게”(요19:32∼37) 하셨습니다. 왜? 접붙임에는 원목은 필요하지 않고, 가지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접붙임’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접붙임 받아 다시 사는 거듭남입니다.
유희세 교수께서는 『구약 연구 <상권>』(2009년 11월 17일 발간) 35쪽에서 “우리는 아담의 타락으로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도로 찾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상실한 하나님을 도로 찾을 수 있는 길은 예수님에 의지한 ‘접붙임의 만남’ 뿐입니다. 유희세 교수는 구약 연구를 하면서 이렇게 도로 찾음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류 창조
하나님은 인류 창조를 두 번 하셨습니다.
처음 창조는 하나님의 몸에서 나온 생기(生氣)로 인류의 조상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두 번째의 창조도 처음 창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생기-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피를 접붙임 받음으로써 하늘 백성이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사건을 접붙임으로 보는 것입니다.
인류는 모두 죄인(罪人)이요, 모두가 들포도나무인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하나님의 생기를 가진 참포도나무로 인류 한가운데 심어졌습니다. 십자가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달아 놓고, 농부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갈기갈기 찢어 들포도나무인 강도가 죽어 없는 자리에 접붙임 하는 사건이라고 본 것입니다.
성서에는 [다 이루었다가] 두 번 나옵니다.
(1) 창세기 2:1에 “다 이루었다” “천지(天地) 만물(萬物) 인류(人類)의 창조(創造)를 다 이루었다” 즉 천지 창조 인류를 완성하셨다는 뜻이다.
(1) 요한복음19:30에 “다 이루었다”는 하늘 백성으로 개량(改良) 사업을 완성! 성취! 달성! 이룩하다 는 뜻이다.
사도요한은 계시록 21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이야기합니다. 인류가 거듭남이 없으면 ‘새 하늘과 새 땅’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인류가 거듭남으로 하늘 백성이 될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이 필요한 것입니다. 계시록 21장 27절은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하늘 도성”에 들어간다는 기록입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이란 그리스도의 생명인 것입니다.
하늘나라 백성은 하나님의 유전자로 지음을 받습니다. 접붙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야 하늘백성이 되어집니다.
◇ 솔로몬의 옛 성전은 아담의 자손 인류의 죄를 짐승의 죽음으로 대속 받는 제도입니다.
◇ 새로운 성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접붙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접으로 내 마음 속에 지어집니다.
증언자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聖殿)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聖靈)이 너희 안에 거(居)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물었습니다. 우리들 마음 안에 성령님이 계시는-즉, 우리 몸이 성령의 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에서 죽고, 농부인 하나님이 인류에게 접붙임의 일을 사흘 동안에 완성하시여 새로운 성전을 사흘만에 건립을 하셨습니다.
“접붙임의 만남”은 십자가의 구원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비유입니다.
“신앙”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으로 하는 영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하는 영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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