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공부 4>
은혜(恩惠) 위에 은혜더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1:15∼18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 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充滿)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더라. 율법(律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獨生)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사도 요한과 예수 세례 요한의 그리스도관(觀) 비교
지난 공부에서 요한복음 1:9∼14절까지는 요한복음을 쓴 사도 요한이 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독생자(獨生子)로 보았고, 이 독생자는 창조 때부터 계셨음을 강조합니다. 그러한 예수가 인류와 하나 되기 위하여 왔음을 이야기합니다.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보고 있습니다.
한편, 1:15∼18절까지는 세례자 요한이 본 예수 그리스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도 사도요한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은 의미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더라.”(16절) 여기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위대함을 봅니다.
다시 말하여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獨生子)로, 덧붙여 우주만물 창조 때부터 계셨던 창조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조금 달리 “하나님 품속에 있는 독생(獨生)하신 하나님”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바울’이란 대 증언자가 있었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간파한 ‘나다나엘’이란 현명한 청년도 있었습니다. 유대 민족의 위대성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는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도 메시야의 도래(到來)를 앙망하였습니다. 또 예루살렘 성전지기인, ‘시므온’이란 사람은 아기 예수를 보고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눅2:30) 하며 ‘장차 이 아기가 구원자, 곧 인류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실 분’이라고 좋아 함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과부로서 성전지기로 84년 동안을 성전에 살면서 메시야를 기다린 여인이었습니다. 그녀 또한 아기 예수를 보고 인류 구원에 대하여 이야기를 합니다.
같은 시대에 살던 그들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본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獨生子-우주 만물 창조자의 아들로 보았고, 세례요한은 스스로 독생(獨生)한 자(者)-하나님 품속에 있는 그분이 오심을 본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의 말 한 마디에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요1:49)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요? 그것은 인물을 인물로 알아주는 사회가 가장 아름다운 사회일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이건, 사회이건, 국가이건 마찬가지입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오셨는데-그를 알아 본 사람이 이스라엘에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독생자(獨生者)! 또는 스스로 오신 하나님으로 보았던 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것이 최고의 복이요 구원입니다.
본문 말씀 분해
15절 예수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외침
16절 은혜 위에 은혜더라
17절 율법은 모세로부터,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18절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본문 공부
15절 “요한이 그에 대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본문에서 “그”는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외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목이 터지도록 외칩니다. “내가 전에 말했던 분이 바로 이분이시다!”라고 말입니다. “이분이 세상에는 나보다 뒤에 오셨지만, 먼저 계신분이다!” “처음 우주만물 창조 때부터 계신 분이다!” 하며 외치고 또 외치는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립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를 만나기 전부터 말해 왔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은 나보다 먼저 계신 분으로 우주만물의 창조자(創造者) 되시며 운행자시다.”라고 말입니다. 그 후, 예수님과 처음 만났을 때 즉시 알아보고 “바로 이 분이 내가 말하던 그 분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라고 기뻐 외쳤던 것입니다.
16절 “우리가 다 그의 충만(充滿)한데서 받으니 은혜(恩惠) 위에 은혜더라.”
여기서 우리는 누구를 이야기 합니까?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접하는 모든 사람들을 우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시대에 세례자와 같이 하였던 사람과 오늘날 성서를 통해 세례자 요한의 말씀을 접하는 모든 사람이 우리입니다. 곧, 택함을 받아 이 성서를 접하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인 것입니다.
“그의 충만(充滿)한 데서 받으니” ‘그의 충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입니다. 충만은 가득 찼다는 뜻으로, 가늠할 수 없도록 큰 그릇에 가득 찬 양(量)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가득하게 늘 차고 넘침을 이야기합니다.
예화 하나. 예수께서 빈 들판에 가득 찬 청중들에게 말씀을 하던 중 식사 때가 지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사람들을 이대로 보내면 돌아가는 도중에 기진하여 쓰려져 탈진 할 수 있으니 이들에게 떡을 주어서 먹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 같은 스승의 말씀에 제자들은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떡을 먹이려면 많은 양의 떡이 필요한데, 그렇게 하려면 많은 경비도 들것입니다. 설마 돈이 있다고 한들 이들에게 먹일 떡을 갑자기 어디에서 구하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예수께는 돈도 없었지만, 많은 양의 떡도 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 바로 그 것입니다. 이 오천 명은 단순한 숫자의 개념을 벗어나 인류 전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에 넘치게 남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토록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 흘린 피가 인류에게 생명을 주고도 남음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떡 기적입니다.
“은혜에 위에 은혜더라” 은혜는 십자가상에서 흘린 피로 인류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워 주는 것을 말합니다. ‘은혜 위에 은혜’란 생명을 주심으로 은혜의 끝이 아니고 계속하여 이어짐을 말합니다. 즉 이 은혜를 알게 깨달음을 주심도 은혜로 되고, 모든 것들이 다 은혜로 되어짐을 이야기하는 말입니다. 은혜 위에다 더 한층, 보다 더, 더욱 더 주어지는 은혜를 말합니다.
17절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율법은 모세를 통(通)하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율법도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대로라면 모세와 예수는 동격이 됩니다. 그러나 모세와 예수는 결코 동격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본문 가운데에서 ‘말미암아’라는 표현의 번역에 문제가 있습니다. ‘말미암아’라는 말은 ‘누구를 통하여’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주신 것이 맞습니다만 ‘은혜와 진리’는 누구를 통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왔습니다.’ 로 표현해야 이치에 맞는 말이 됩니다.
인류 창조 때에, 하나님이 흙으로 만들어진 당신의 모형에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을 창조하신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출현(出現)한 생명(生命)이 곧 죄인인 사람들에게 접목되는 것이 은혜와 진리입니다. 그리하여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나는 생명-곧, 생명의 진액입니다.
요한복음서 1장 17절을 일본어 성경(신공동번역 판)에서는 아래와 같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律法はモセを通し与えられたが 恵みと真理はイエス キリストを通して現れたからである” 위의 글에서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이 잘못 번역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 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나다, 또는 출현되다 로 번역되어야 맞는 것입니다.
일본어에서 現れたから는
‘나타나다’, ‘출현’, ‘저절로 나타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하여 인간 창조 때에 하나님에게서 생기가 나와 그 생기가 흙과 만남으로 사람 즉, 아담이 창조 된 것 같이 두 번째 인류 재창조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새 생명으로 인류가 재창조되었는데-이것을 가리켜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출현하였다(또는 나타났다)’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의 생기가 흙과 만남으로 아담이 창조되었습니다.
두 번째 창조-곧, 하나님의 인류 품종개량사업인 십자가 사건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흘린 피를 들포도나무로 전락한 인류에게 줌으로써 하늘의 생명을 가진 참포도나무로 개량하는 사업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참생명을 준다는 것입니다. 참생명의 피를 접붙임으로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의 자녀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이 말씀은 십자가상에서 흘린 피를 받으면 혈통의 관계-곧, 부모와 자식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18절 “본래(本來)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獨生)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담 이후 하나님을 눈으로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말씀과 영으로, 빛과 생명으로 계셨지만, 본문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사람으로는 볼 수 없는 ‘아버지 품속에 있는’ 그 분 하나님이 홀로-즉, 스스로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있는 존재로, 신약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태어나신 것으로 세례자 요한은 본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을 쓴 요한은 하나님의 외아들을 뜻하는 독생자(獨生子)로 오셨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오신 것이나, 외아들로 오신 것이나 어떻든 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인류를 새롭게 하시려고 오신 것은 분명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인류가 지음받을 때는 극상품 포도나무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극상품 포도나무에서 들포도나무로 전락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은 들포도 농장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 들포도 농장 한 가운데에 하나님-태초부터 생명으로 계신 그분이 참 포도나무로 오셨습니다.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던 그분 예수 그리스도가 참포도나무로 오셔 들포도 농장 한 가운데 심어진 것입니다. 좋은 접붙임 가지를 얻기 위하여 말입니다. 이 일을 농부인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아버지 품속에 계신 분이 독생 즉, 스스로 오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사도요한이 본 것처럼 독생자로 보아도 좋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처음 창조 때에 흙의 형상에 생기를 불어넣어 아담을 지으신 그분이 그리스도로, 또는 참 포도나무로 오시어 십자가상에서 흘린 피를 들포도나무인 인류에게 줌으로써 참생명을 얻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자로 나선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 23절에서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에 거(居)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能力)이 하나님께 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에 거(居)하지 아니하면’이란 말은 무슨 뜻입니까? ‘불신자로 있지 아니하면’이란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믿음에 거(居)하면, 접붙임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결론은 ‘농부인 하나님께 접붙임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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