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공부

시작하는 말

임중기 2010. 1. 7. 19:58

요한복음 공부


시작하는 말

  요한복음 공부에 들어가기 전에 요한복음이 쓰여진 역사적 배경과 기록된 때를 논하는 일, 또는 어디에서 기록 되었는가? 등은 학자들에게 맞기고, 여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요한이 기록한 성서 말씀만을 공부하겠습니다.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에서 으뜸이 되는 복음서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에서 으뜸 복음서에 대한 마땅한 주해서가 없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로마서에 관한 주해서는 많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우치무라(內村鑑三) 선생의 로마서 주해서나, 노평구 선생의 로마서 주해서는 참으로 좋은 주해서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서 중의 으뜸이라는 요한복음에 관한 이렇다 할 주해서가 세상에는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개신교 500년 역사에서 마틴 루터의 속죄의 신앙관(信仰觀)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루터의 대속이나 속죄의 신앙관으로는 절대로 깊이 접근할 수 없는 성서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을 주해하고 싶은 성서연구가가 왜 없었겠습니까? 요한복음을 주해하려고 붓을 든 사람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대속의 신앙관으로는 접근이 불가능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붓을 놓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믿음을 강조하는 로마서만 공부하고 또 공부하여 온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 사정입니다.

  로마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증거의 말씀이 으뜸인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주객전도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진리, 길의 중심이 되는 진리가 요한복음인데, 정작 중심의 자리에는 로마서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증인석에나 있어야 할 로마서가 거꾸로 중심이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그리스도교 현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생명-곧 창조의 생명, 생육번성의 생명, 구원의 생명인데 이것을 증언하는 로마서가 증언 석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교 중심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덧붙여 밝힐 말씀은 지금까지 신, 구약 성서 주해(註解)서는 우리나라 사람 것이나, 외국인의 성서주해서는 참고하지 않겠다는 것을 밝혀 둡니다. 오직 신, 구약 성서만 참고서로 보겠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란 말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공부의 목적

 창조주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신 원리로 우주 만물이 생육 번성함을 요한복음을 통해 밝히고, 아담의 죄악으로 에덴에서 추방당하여 세상이라는 땅에서 죄에 묻혀 살아가는 인간들을 하나님이 불쌍히 보사, 구원자 하나님 곧 창조의 하나님이 육신의 옷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로 오시어, 인류를 처음 창조 때의 아담의 모습으로 회귀하게 은혜를 내리시는 그분의 참 모습을 보는 데에 공부의 목적이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 하여 처음 창조의 원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인 생기와 흙의 만남인데, 이 만남의 원리로 우주 만물과 인류의 생육 번성을 보고, 그 만남의 원리로 우리 인류가 십자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구원받는 모습을 보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창조의 원리가 생육 번성의 원리요 구원의 원리임을 찾아 보임으로

  예수 그리스도

  첫째, 창조자요,

  둘째, 생육 번성생명력의 근원이요,

  셋째, 최종 구원자로 우뚝 서 계심 바로 전하는 목적이라고 하겠습니다.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한가운데 좌정한 모습을 그렸습니다. 거기에 상대적으로 제자들은 몸을 뒤로 재끼고, 앞으로 구부리고, 옆으로 비트는 등 바른 자세가 아닌 모습을 그림으로써, 좌정에 유일신 하나님을 잘 표현하였습니다. 어느 누가 저토록 바른 자세로 앉아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교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을 바르게 공부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좌정하실 것입니다.


 

 우주 만물과 인류의 창조

 

 본문 말씀 요한복음 1: 1-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太初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萬物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生命이 있었으니 이 生命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본문 말씀 분해

 (요한복음 1장 1∼5절)


  1-2절,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가 태초(太初)에 말씀으로 계심.

  3절, 천지 만물과 인류의 창조자 예수 그리스도.

  4-5절, 우주만물의 운행자.


본문 공부

  본문 1절. “태초(太初)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서의 머리말로, ‘태초!’ 이 우주가 만들어지던 첫 순간부터 ‘말씀’이 계신 것입니다. 즉, 아무것도 없는 공허(空虛)한 곳에 ‘말씀’이 계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말씀!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절 하반절 말씀처럼 하나님은 형상으로 보이시지 않으시고, 말씀으로 계셨는데, ‘있는’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본문 2절.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여기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태초’라는 말은 구약성서에서도 나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분! 곧, 천지를 창조하신 그분과 함께 하신 분이 요한복음에 예수 그리스도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본문 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만물이 그,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고, 어느 것 하나도 그, 곧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요한복음 1장 3절의 말씀은 태초부터 예수가 창조자로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으로 나타나십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 이사야 등,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으로 임하심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나는 처음과 나중’이라고 하였습니다. 곧 자신은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신 것입니다(이사야서 48:12, 요한계시록 21:6).


  ‘알파’  창조자로 서신 예수 그리스도!

  ‘오메가’ 최종 구원자로 서신 예수 그리스도!

 그런데 이 창조와 구원이 하나의 논리, 하나의 원리로 되어야 전능자(全能者) 예수 그리스도란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교 2000년! 개신교 500년 동안, 창조의 원리와 생육 번성에 원리를 간과(看過)하고 있습니다. 창조와 생육 번성을 보아야 구원의 원리가 보이는데, 현제의 그리스도교, 개신교는 구원의 원리만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은 믿음만으로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 창조의 과정과 인류, 만물의 생육 번성을 보면 구원이 십자가를 통하여 보이는 것입니다.


창조의 원리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을 지으셨는가?’

 하나님이 하늘과 땅, 바다를 지으시고, 그 위의 생물을 지으실 때 모든 것을 말씀으로 창조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직 ‘사람’만은 말씀으로가 아니고 행동으로 지으심을 봅니다.

 

하나님은 하늘, 땅, 바다, 각종 짐승들, 나는 새, 바다의 어족, 모든 식물들을 말씀으로 지으신 후 당신의 뜻대로 되어진 것을 보시고 좋아 하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말씀으로 되어졌음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 창조는 말씀으로가 아니고 행동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일을 하시어 지으심을 봅니다.


 창세기 2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말씀처럼 ‘흙과 생기의 만남’ 으로 첫 인간인 아담이 창조되었습니다. 창조는 만남입니다. 하나님의 생기와 흙의 만남이 창조의 원리입니다. 하와도 만남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아담의 갈빗대와 하나님의 만남으로 하와가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갈비대로 취(取)하는 동시에, 하나님과 갈비대의 만남이 됩니다.   그리하여 창조의 원리는 만남입니다.


 창세기 2장 22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取)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아담과 하와의 만남” 은 본능의 만남입니다. 본능으로 자신의 반신(半身)으로의 만남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만남은, 피조물과 피조물의 만남입니다. 처음으로 피조물과 피조물의 만남을 봅니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아담이 하와를 보고 ‘이는 나의 뼈요, 살’이이라고 한 대목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하와는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어졌는데, 그 갈빗대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 결혼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생각이 같아야 참다운 만남이 있는, 둘이면서 하나같은 삶이 최고의 부부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교 진리는 부부의 가치를 높이는 부부관이 있습니다. 이 세상, 어느 종교에 이보다 더욱 부부의 가치를 높이는 부부관이 있습니까? 이렇게 좋은 부부관이지만, 오늘의 많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주장만을 고집하므로 부부가치관이 엉망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만남을 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처음으로 만들어진 그들도 ‘본능 의식’으로 서로서로 만남으로써 생육하고 번성합니다.


 공중의 새도 서로 만남으로 생육하고 번성합니다. 들짐승도, 가축도 서로 만남으로 생육합니다. 어족도, 들에 꽃도 별과 만남으로 씨알이 생성되고, 땅에 떨어져 ‘땅과 씨알의 만남’으로 새 싹이 돋습니다. 언어도 단어와 단어가 만나면 새로운 단어가 생성됩니다.

 이 만남“창조의 원리요, 생육 번성의 원리, 구원의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창세기 2:1에서 “천지(天地)와 만물(萬物)이 다 이루니라” 하였고, 신약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복음 19:30 하반절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였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 인류의 창조를 다 이루었다’는 뜻이고, 신약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재창조를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 선악과를 따먹다

 “강(江)이 에덴에서 발원(發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창세기 2:10)” 네 근원은, 에덴에서 발원하여 네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하는 강의 시원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첫째 강은 비손, 두 번째 강은 기혼, 셋째 강은 힛데겔, 넷째 강은 유브라데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에덴동산은 물이 풍부하고, 각종 과일과, 셀 수 없도록 많은 꽃들과 아름다운 새들의 노래 소리가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아름답고 사랑이 넘치는 에덴동산에서 살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그 곳에서의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고 금지의 과일 선악과를 따먹으므로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습니까? 그것은 거룩하고 거룩한 빛의 근원인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몸으로 하나님을 대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광체에 압사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이 두려워 숨은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추방하였는가?

 자신의 새끼는 애지중지 하는 것이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다. 하물며 하나님이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아담과 하와를 사랑하는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도 죄악으로 물들어 있는 당신의 창조물인 아담과 하와를 추방하지 않으면 그들은 살수 없게 되어있었습니다. 이미 그들은 죄로 물들어 사탄에게 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에덴에 두어도 될 사정이었으면 하나님은 그들을 계속 그곳에 두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곳에 두면 그들은 죽게 되어있었습니다.


 물고기가 예쁘다고 사람의 손에 오래 둔다면 그 물고기는 죽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사랑해도 이미 죄인이 된 그들이 하나님을 보면 죽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 거룩한 빛의 근원이라 죄인이 보면 죄인은 죽게 되었습니다. 결국, 에덴에서 내보내야 그들이 살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죄인의 몸이지만, 살려보려는 하나님의 큰 배려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낯을 피해야 살 수 있었고,

 하나님은 아담을 추방하여야 그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에덴에서 추방

--------------------------------------------------------

-----------------------------------------

-------------------------

에덴과 곧 하늘나라와, 세상의 땅에 경계

-------------------------

-----------------------------------------

--------------------------------------------------------

세상! 죄로 물들은 사람들이 사는 땅


 도망과 추방이라는 두 면을 다 가지고 에덴의 바깥 땅, 곧 세상으로 나온 아담과 하와는 죄로 물들어 하나님과 단절된 이분화(二分化) 사회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 이분화 상태를 예언자 이사야는 “極上品(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이사야 5:2)고 탄식하였습니다.

증언자 바울 사도는 로마서 3: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이분화 상태로는 하나님 앞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만 이 이분화 상태에 있는 우리와 하나 되기 위하여 왔다고 합니다. “너희와 하나 되기 위하여 왔다.” (요한복음 6:56)


 4-5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 4-5절에 말씀 안에는 4,5천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적 공간이 들어있습니다. 그 시간적 공간 사이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의 대홍수가 있었고,

 바벨이라는 탑으로 하늘까지 정복하려는 교만이 인간들에게 있었으며,

 창세기 12장에서는 하란 땅의 젊은 아브람에게 ‘너는 너의 本土 친척(親戚)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하여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택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00세에 아내 사라에게서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과 그 형제를 낳고, 야곱은 요셉을 낳아 애급에 총리대신이 되었으며, 그 후 400년 동안 애급에서 노예 생활을 하였으며,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넌 이스라엘 백성. 그 후 광야 40년 세월동안 연단하여 가나안에 입성하는 시간적 공간이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은 선지자(先知者) 시대와, 사사(士師) 시대, 왕정 시대를 거쳐 포수 시대까지 수대에 걸쳐 늘 변천하며 여러 사람에 의하여 쓰여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선지자 이사야가 최고의 기록자로,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보여주는 선각자였습니다.

 이사야는 이사야서 1장 2절 이하에서 “하늘이여 들어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子息을 양육(養育)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主人)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로다.”고 탄식의 노래를 읊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5장 2절에서는 “ 극상품(極上品)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고도 하였습니다.

 이는 포도나무의 이분화 상태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심을 때는 극상품 포도나무였는데 그 열매는 들 포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담도 에덴에서 창조되었지만, 만년에는 저주 받은 땅에서 살다가 죽습니다. 이 역시 이분화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이분화 상태에 있는 하나님과 인류를 하나 되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아담은 극상품으로 지어졌는데 죄를 범하여 에덴에서 추방당하게 됨으로 이분된 삶을 산 것을 이사야는 포도나무로 비유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계속해서 인류를 향하여 이야기 하자는 하나님의 애절한 호소를 전달합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사야서 1장18절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朱紅)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眞紅) 같이 붉을지라도 양(羊)털 같이 되리라.” 하나님의 사랑을 이스라엘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 안에 있는 생명은 우리 인간을 창조한 ‘창조의 생명’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었다는 그 생명사람들의 빛입니다.

 ‘그 안’이란 세상을 말합니다. 세상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은 창조의 생명력입니다. 이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요, 구원의 빛입니다.

 본문 5절. “빛이 어두움을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4,5절의 생명과 빛은 창조의 생명이고, 그 생명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빛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빛이지만, 어둡기 짝이 없는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인류를 창조하셨고, 만물이 생육하고 번성의 생명력으로 오늘까지 영원히 계시고, 구원도 그 생명을 십자가상에서 ‘접붙임의 만남’으로 됨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처음 창조 때에, 하나님의 생명인 ‘생기와 흙의 만남’으로 사람이 됩니다.

 만물은 서로서로 만남으로 생육하고 번성합니다.

 최종 구원도, 처음 창조 때와 같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십자가상에서 들 포도나무인 ‘인류’“접붙임의 만남”으로 ‘극상품 참 포도나무’ 회복되어 인류가 처음 살았던 에덴에서 본래의 아담의 모습으로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늘 백성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접붙임의 만남으로 접목된 들포도나무가 참포도나무로 새로 싹이 돋기 위해서는 부활의 봄이 와야 합니다. 그래서 사흘 동안 땅 속에 있는 것입니다. 부활초로 부활 한 뒤에는 참포도나무로 살아가게 됩니다. 들 포도나무가, 참 포도나무로 거듭났으니 하늘 백성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와 하나 되기 위하여 왔다(요6:56)고 하셨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2009년 5월 10일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