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공부3>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요한의 지혜와 밝은 영(靈)의 눈을 봅니다.
요한은 1:1-2에서 태초에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합니다.
1:3절에 그가 곧 예수 그리스도가 우주 만물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보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4-5에서는 그분이 지은 땅! 세상,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 을 요한이 본 예수 그리스도상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요한 사도의 영(靈)의 밝은 눈을 봅니다. 이렇게 요한이 보고 기록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보여 주심으로 보고 기록한 것입니다.
6절부터 8절까지 세례요한을 소개하고, 그가 곧 세례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에게 소개하고 안내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만 잘 보고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을 참으로 바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공부에서 자연의 겨울잠을 봄바람이 깨워 모든 식물들이 새싹이 돋아나게 하는 것 같이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운행하신 우주만물, 인류가 창조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빛으로 말씀으로 계셨지만, 그들이 알지 못하므로 세례요한을 보내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인류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한 것을 이야기하고 보았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독생자(獨生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살펴볼까 합니다.
본문 말씀 요한복음 1:9∼14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各) 사람에게 비치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 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居)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獨生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본문 말씀 분해
9절 “세상 각(各) 사람에게 비치는 참빛”
10절 “그로 말미암아 우주만물, 인류를 지은바 됨”
11절 “자기가 지은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12절 “영접하는 자들에게 주는 권세”
13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
14절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본문 말씀 공부
9절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치는 빛이 있었나니”
밤의 어둠에서 태양의 떠오름으로 밝음을 보는 것 같이, 우리들 각 사람의 마음의 눈이 어둡지만 “참빛”으로 오신 생명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마음의 눈이 밝아지게 됨을 이야기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시고, ‘생명의 떡’이라고도 하셨으며, ‘참빛’ 이라고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은 1장 전반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참빛”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눈에 하나님의 본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으면 마음의 눈이 밝아 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우리가 십자가상에서 주를 따라 죽어 “나”라는 존재가 없는 상태가 되어야 예수 그리스도의 “참빛”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마음눈이 밝아질 수 없습니다. 영접하면 그곳에 하늘의 생명이요, 하나님의 본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의 생명과 합체(合體) 되어 나는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찬송가 495장에는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라는 소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중한 죄짐’을 벗는다는 것은 거듭남을 표현한 말입니다. 거듭남의 눈으로 볼 때에 ‘슬픔 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비치는 빛이 있었나니” 우리 영혼 안에 빛의 근원 즉, 참빛으로 오심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참빛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마음눈을 밝히는 참빛으로 오시면, 한낮을 비추는 태양과 같이 우리들과 이 세상을 참과 진리로 밝혀 주신다는 것입니다.
10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태초부터 창조자로 계셨다고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은 그-곧,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지은바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신의 주인인 창조주(創造主)를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입니다.
11절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 하였으나” 여기서 ‘자기 땅’은 자신이 지은 땅-곧, ‘예수 그리스도가 지은 땅’을 말합니다.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죄에 빠진 백성들은 그 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자신을 영접할 백성에게 큰 선물을 준비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비록 자기 백성들이 영접치 아니 하였지만, 늦게라도 영접하는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준다는 것입니다. 이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로서, 구세주로서 우리들에게 주신 큰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녀의 권세는 부자(父子)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자 관계는 곧 혈통(血統) 관계입니다. 혈통은 생명을 뜻합니다. 아담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흙으로 빚으시고, 그 형상에 자신의 생명인 생기를 불어넣음으로 생성된 그 생기와 흙의 만남의 관계는 생명-곧, 혈통의 관계 또는 생명의 관계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상에서 들포도나무인 인류 강도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포도나무로 생명을 주신 것도 생명-곧, 혈통의 관계, 또는 생명의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는 첫 인간 아담을 창조할 때의 생명이요, 인류 재창조를 위하여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피를 십자가의 접붙임의 만남에 생명입니다.
뒤돌아보면, 세상 창조의 맨 마지막에 만들어진 첫 사람 아담은 순결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사탄의 유혹으로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이사야는 “처음 창조 때에 아담은 극상품 포도나무였는데, 아담이 죄에 물들어 들포도 열매가 되었다(사5:2)”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들포도나무인 인류를 참포도나무로 바꾸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접붙임의 일은 농부인 하나님이 하십니다. 증언자 바울은 “접붙임의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고 하였습니다.” (롬11:23 참조).
인간 창조 때에 흙에 생기를 불어넣어 아담이 창조된 것과 인류 구원자로 오신 하나님-곧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 재창조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린 사건은 같은 맥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십자가상에서 접붙임으로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혈통! 또는 생명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 다시 살 때는 하늘 백성으로서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받아 사는 것입니다.
증언자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을 받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부활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증언자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우리들의 믿음을 정의(定意)하기를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 이에 대한 답으로 바울은 로마서 6장 11절에서 “너희 자신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끝부분의 ‘여길지어다’라는 대목은 믿으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여
‘너희 자신은 죄에 대하여 이미 죽었다는 것을 믿으라’고 하였으니 우리들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서는 이미 산 자로 되었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죄인 강도는 이미 십자가상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가 죽을 때에 강도와 같은 우리도 죄의 몸을 멸하기 위하여 이미 죽었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달리 생각하면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흘린 피로, 새 생명을 받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에는 두 가지 의미(意味)가 있습니다.
첫째, 믿음은 하나님이 다 이루어 놓은 인류 구원의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로마서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믿음은 자신의 소망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히브리서 믿음입니다. 자신의 소망을 이루어 주실 줄 믿고, 기도드리며 소망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일컬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로마서적인 자신의 구원을 믿는 믿음이 없다면 후자의 믿음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의 구원의 믿음으로 거듭난 후에, 그 믿음에 따라 소망이 생기고, 그 소망을 앙망하는 믿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남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짐을 믿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성서 조선’지의 발기인들-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선생들의 소망인 ‘성서를 사랑하는 조선에게,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운다는 것은 소망의 믿음이었습니다. 국희종 선생이 『이사야서 강의』에서 인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한 것이나, 노평구 선생이 늘 “제2의 루터, 제3의 루터가 한국에서 나와야 한다”고 앙망한 것들이 히브리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이 실상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말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게 된 것도 다, 은혜로 된다고 하여 “은혜 위에 은혜더라” 하였습니다.
13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아들의 권세! 이는 죄를 범한 아담과 유대인의 혈통,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났어도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의 생명으로만 인류 구원이 되고, 우리가 하늘 백성으로 다시 사는 것은 독생자의 생명을 십자가를 통해 접붙임 받는 길,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모두가 생명으로 영접하는 길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뜻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 분의 뜻-곧, 농부인 아버지의 뜻으로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여기에서 ‘난 자들’이란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포도나무의 생명을 받아 거듭난 자’들을 이야기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새로 지음을 받은 사람만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인 것입니다.”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居)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천지창조 때부터 말씀으로 영(靈)으로 계신 그분-유일신 하나님이 그 높고 높은 하늘나라 천군 천사의 찬양과 영광을 다 뒤로 하고 오셨습니다. 우주 만물의 창조 때부터 말씀과 영으로 계신 창조주가 우리와 같이 육신의 옷을 입고, 우리 인류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이 볼 때에 그분, 태초부터 창조주로 계신 하나님 곧, 말씀이 육신의 옷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 가운데 거(居)하신다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보지 못한 것을 요한은 보고 기록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요한의 영의 눈을 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이 은혜로 보여 주신 것으로, 그분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요한과 그 시대의 사람과 오늘의 사람, 또는 미래의 사람들을 아우른 모두가 ‘그 영광을 본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을 쓴 요한만 주님의 영광을 본다는 말은 아닙니다. 요한도 보고, 지금 우리의 눈으로도 그 영광을 봅니다. 곧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그 영광을 본다는 것입니다.
어떤 영광인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를 일컫고, 예수 그리스도는 곧 조물주의 아들이란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가운데 육신의 옷을 입고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 이 얼마나 위대하고 대단한 분입니까? 그 분이 죄 많은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의 기(氣)의 능력과 사랑! 자신이 죽기까지 인류-나와 여러분을 사랑하신 그분의 위대한 사랑과 오묘한 능력을 요한은 보고 독생자의 영광으로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독생자! 하나뿐인 하나의 귀중함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독생자1)는 두 가지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외아들-獨生子로 오셨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고, 다음으로는 홀로, 스스로-獨生者로 오셨다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 인류는 그 분의 생명을 받아야 하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하늘 백성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의 생명의 유전자를 갖고 있어야 하늘 백성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어떤 다윗의 씨라 하여도 하나님의 독생자의 생명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유전자를 갖고 있어야 하늘 백성이란 것을 증언자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에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聖靈)의 전(殿)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값으로 샀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내 피를 십자가상에서 너희에게 주어 내 생명의 일부분으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19절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그래서 “영광을 그분에게 돌리라”는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여기서 은혜란 우리에게 아무런 대가없이 하늘 아버지의 생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흙의 형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아담을 창조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흘린 생명의 진액 곧, 보혈의 피를 죄인에게 주신 것이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6장 50,51절에서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은혜는 곧 산 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생명의 떡을 십자가상에서 갈기갈기 찢어 나누어 준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때에 보리떡 다섯 개를 자신의 손으로 띄어 나누어 주셨는데, 이 보리떡 다섯 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표징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십자가상에 놓고, 그 살을 갈기갈기 찢어 인류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모습을 상징(象徵)으로 보여주는 기적이었습니다.
떡 다섯 덩어리와 생선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먹고 12광주리에 넘치게 남았습니다. 이 남음을 ‘은혜가 충만하다’로 기록한 것입니다. 이 남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인류 모두에게 생명을 주고도 12광주리에 남았으니 은혜가 충분하여 넘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받았으니 그분의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그분의 피를 소유하게 되었으니 은혜란 것입니다.
십자가상에서 강도는 생명의 떡을 받기 위해 죽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 생명을 강도에게 나누어 주기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와 진리입니다. 독생자(獨生子)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여 모든 인류에게 생명의 떡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구불변의 진리요,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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