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공부6>
세상 죄(罪)를 제거하는 하나님
본문 말씀 1:29∼34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罪)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羊)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洗禮)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한이 또 증거(證據)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聖靈)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聖靈)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노라 하니라.”
본문 말씀 분해
29절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
30절 태초부터 계신 분
31절 이스라엘에게 나타냄
32절 성령이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 34절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證據)
본문 말씀 공부
세상 죄(罪)를 제거하는 하나님!
29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羊)’이로다.”
위의 내용을 보면 ‘예수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마틴 루터가 주장한 대속의 신앙을 뒷받침하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신(新) 공동번역 성서에는 아래와 같이 되어 있습니다.
“その翌日 ヨハネは 自分の方へイエスが来られるの見て言った 見よ世の罪を取り除く神の小羊だ.”
여기에서 罪を取り除く이 부분의 우리말 성서는 ‘죄를 지고 가는’ 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取り’ <도리>는 한국어로는 얻다, 받다, 잡다 등의 뜻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 하면 ‘손으로 잡다’ 즉, ‘죄를 잡아’로 번역하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除く’ <노죠꾸>는 ‘없애다, 치우다, 제거하다, 죽이다’로 번역 할 수 있으며, 전체를 번역하면 “죄를 잡아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봅니다. 죄를 잡아 없애는 일을 농부인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강도와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로마 군병에 의하여 못을 박아 죽임을 당하는데, 강도와 예수의 죽음의 의미가 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대표인 강도는 강도의 죄 된 몸을 제거하기 위하여 본문 말씀과 같이 “죄를 잡아 제거하는” 의미의 죽음을 당하는 것이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어린양으로서 희생양의 피-곧, 참포도나무의 가지를 하나님이 취(取)하기 위하여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神の小羊だ 하나님의 어린 양’ 여기에서 하나님은 성부(聖父)요,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 즉, 성자(聖子)입니다. 하나님은 어린양을 어디에 쓰시는가? 들포도나무의 접붙임에 쓰시게 됩니다. 십자가라는 형틀에 매달려 죽은 어린 희생양은 참포도나무로서, 진액을 들포도나무에게 줌으로써 접붙임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어린 양의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모든 인류에게 주고 계십니다.
죄인이요, 강도인 우리 인류는 들포도나무로서 밑동이 절단 되어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죽을 때에 그의 뼈가 하나도 상함이 없었습니다. 비유적인 접붙임에 원목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참포도나무 가지에서 나오는 진액(피)만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그의 뼈가 하나도 상하지 않을 것임을 예언하셨습니다(시편 34:20).
예언의 참뜻은 들포도나무인 인류가 접붙임을 받는 것입니다. 이를 신앙으로 말하면 우리의 생명으로의 영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손으로 떡을 떼어 준 것 같이 농부인 하나님이 죄를 잡아 없애고, 그 자리에 농부이신 하나님이 아들의 피로써 접붙임 하는 것입니다.
접붙임은 비유입니다. 접붙임을 받는다는 것은 신앙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생명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요한복음 1:12)”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혈통의 관계-곧, 생명 관계가 성립된다는 말입니다. 같은 피를 이어받으면 예수 그리스도와는 혈연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접붙임의 만남’은 비유적 논리입니다. 진리는 논리가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신앙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 우리들의 생명! 으로 영접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로마서 6장 4절에는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合)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葬事)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榮光)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하반 절의 “우리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한 부분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을 접붙임 받았으니 새 생명으로 행하게(또는 살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부분의 일본어 공동번역 성경에는 “私たちも新しい命に生きるためなのです”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우리들도 새 생명으로 살기위함” 입니다. 여기서 새 생명은 피로 접붙임 받은 새로운 생명을 말합니다.
증언자 바울은 로마서11장 20절에서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이 말씀은 곧 이렇습니다. 두강도가 다 같이 하나님께 접붙임을 받았지만, 한 강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비방하며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다른 강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 하소서”(눅 23: 39-42)하였으니 후자의 강도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예수를 믿지 않으면 죽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믿으면 산다는 말입니다.
이런 믿음을 일찍이 체험한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베드로전서 1:2)에서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擇)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는 접붙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위 구절의 일본 성경을 살펴볼까 합니다. “その血をそそきかけていたたくために選ばれたのです(벧전1:2 하반절)” 우리말로 번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흘러듦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택함을 받은 것이다.” 라고 번역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선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받기위하여 택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편지한다고, 편지 첫머리 인사말에 적고 있습니다.
로마서 6장은 십자가 사건을 증언하는 증언서인데, 바울은 아래와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5절“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여기서 ‘그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6절“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滅)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여기서 ‘죄의 몸을 멸하여’는 죄로 물들은 강도, 우리 인류가 십자가의 강도의 모습으로 죽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죄의 몸을 멸(滅)하기 위하여’ 강도인 나도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도 죽었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을 대속으로 본다면 십자가에서 예수만 죽어야 대속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십자가에서 강도와 예수가 함께 죽었습니다. 여기에서 강도는 죽지 않아야 대속이 되지 않을까요? 증언자 바울은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수 없이 많은 곳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7절“이는 죽은 자가 죄(罪)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우리들 죄인이 죽은 것은 죄의 몸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죽고, 산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8절“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면 육은 죗값으로 죽더라도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산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았으므로 가지(枝體)의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가지는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입니다.
다시 요한복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30절“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세례 요한이 지난날에 했던 말들을 상기하며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 뒤에 오는 사람이∼나보다 먼저 계시다”는 말씀은 태초부터 계셔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이 사람, 예수 그리스도”라고 요한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31절“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洗禮)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앞 절에 이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내가 이곳에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오직 태초부터
계시다가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게 소개”하기 위함이라고 요한 자신의 사명(使命)을 말합니다.
또 다른 증거(證據)
32절“요한이 또 증거(證據)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聖靈)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앞 절의 소개에 이어 또다른 증거 즉, ‘하늘의 징조(徵兆)’를 소개하므로 예수가 하나님의 뜻으로 오신 분임을 말합니다.
“또 증거(證據)하여 가로되”는 또 다른 증거를 내놓는 것입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증거 곧, 하늘의 징조(徵兆)입니다.
“내가 보매 성령(聖靈)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세례자 요한이 예수그리스를 처음으로 본 모습입니다. 요한 자신도 물로 세례를 주는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게 소개하기 위해서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와 머문” 하늘의 징조(徵兆)도 소개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귀중한 증거입니다. 하늘의 징조(徵兆)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하고, 이 모습을 하나님이 보낸 증언자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33절“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聖靈)으로 세례를 주는 이 인줄 알라 하셨기에”
34절“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노라. 하니라”
33절은 앞 절의 보강설명입니다. “나는 그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에게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 위에든지 성령이 내려서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 주는 이 인줄 알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멀리서 오는 어떤 사람의 머리 위에 성령이 내려 머무는 것을 보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줄 그리스도인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저 분이 장차 세상 죄를 제거할 하나님의 아들 어린 양이란 것을 말입니다.
성서를 바로 읽는 눈!
성서는 예언서와 증거서, 복음서, 증언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언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 하시게 될 일들을 예언한 책으로, 장차 다가올 모습을 하나님이 미리 보여주시어 영감으로 예언한 책입니다.
증거서는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직접 보고 들은 언행을 기록한 책으로, 직접 눈으로 보면서 이야기한 세례요한의 증거가 바로 증거서입니다.
복음서는 저 개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언행록이라 하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가 다 인류에게 복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서라고 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을 하시고, 행하신 일들을 기록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증언서는 곧 서신서인데, 대체로 바울 선생이 기록하였던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증언서는 증언자 자신의 예언, 증거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미루어 보고 이끌어낸 자신의 신앙적 결론입니다. 그런데 일부 증언서가 문제입니다. 단순한 증언서로 있지 않고 복음서로 치부하고 있어, 심지어 ‘바울의 복음서’란 말까지 입에 오르고 있습니다. 증언서는 절대 복음서가 아닙니다. 증언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오직 증언서일 뿐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성서를 보면 성서가 잘 보입니다. 바울의 로마서는 참으로 놀라운 증언서 중에 증언서입니다.
이 달의 좋은 책
<취서만필> 이 책은 제목대로 글에 취해서 여러 책들을 읽고, 그 내용을 요약하여 쓴 글들이다.
저자: 장석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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