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공부

유대인 대리인의 질의와 세례요한의 답변

임중기 2010. 2. 7. 19:08

<요한복음 공부5>

유대인 대리인의 질의와 세례요한의 답변


본문 말씀 1장 19∼28절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祭司長)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네가 누구냐?’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證據)가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한대 또 묻되‘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가로되‘나는 아니라.’또 묻되‘네가 그 선지자(先知者)냐?’대답하되‘아니라.’또 말하되‘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가로되‘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주(主)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者)의 소리1)」로라’하니라.”

 

저희는 바리새인(人)들에게서 보낸 자라. 또 물어 가로되‘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요한이 대답하되‘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堪當)치 못하겠노라’하더라. 이 일은 요한이 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본문 말씀 분해

 19절 제사장과 레위인이 세례요한을 찾아옴

 20절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21-23절 질의와 답변

 24절 또 다른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者)

 25-26절 바리새인이 보낸 자와의 질의 답변

 27절 그분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 못함

 28절 베다니에서의 일


유대인의 시녀 제사장과 레위인

 예루살렘이란 곳은 권력자(權力者)들의 집합체(集合體)요, 위정자(爲政者)와 기득권(旣得權)자들의 집합체입니다. 금력(金力) 또한 집중(集中)되어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다 성전(聖殿)이 있는 곳입니다. 이 성전이야말로 성직자(聖職者)들-곧, 기득권자들의 집합체인 것입니다.

 이런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종교지도자, 권력자, 부자들이 자기들의 대리인을 세례자(洗禮者) 요한에게 보내게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저가 누구인가를 알아오라’는 심부름을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심부름을 간 사람들은 참으로 놀랍게도 “제사장과 레위인”이었습니다.

 제사장(祭司長)은 사제입니다. 이스라엘 국민(國民)들의 정신을 높이고, 그것도 신앙의 정신을 높이는데 큰일들을 하여야 할 분들이 권력자들과 기득권자들의 시녀(侍女)로 전락(轉落)한 모습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습니다. 레위인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장차 제사장이 될지도 모르는 제사장 후보 반열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권력자들과 기득권자들의 시녀(侍女)로, 또는 하속(下屬)인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들은 권력자들과 부자, 기득권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소리를 듣고, ‘저 소리는 새로운 소리인데 무슨 소리냐?’ 하는 의문(疑問)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적(信仰的)으로 민감(敏感)해 있어야 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세례자 요한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전혀 가치를 두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저 단지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도록 답을 달라.”고 하는 주문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신앙적으로 정신적으로 썩을 대로 썩어 있음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여야 할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도리어 권력자들의 시녀, 또는 하속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先知者)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派送)된 자(者)들을 돌로 치는 자(者)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子女)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願)치 아니하였도다(마23:37).”하시며 통곡하신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이 썩을 대로 썩었기에 메시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해 받을 사람이 예루살렘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멀리 떨어진 동방(東方)의 이방인(異邦人) 박사(博士)들과 함께 들판에서 양(羊)을 치며 밤마다 하늘의 별들에게 “너는 메시야 도래(到來)를 알겠지?” 하며 속삭이던 목자들에게 그 소식이 전해졌던 것입니다.

 이런 나라는 희망이 없는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외치며 통곡하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주후 70년경에 찾아온 예루살렘 패망의 까닭이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공부.

 19절“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祭司長)들과 레위 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네가 누구냐?’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證據)가 이러하니라.”

광야에서 들려오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는 커다란 소리에 놀란 유대인들이 제사장과 레위 인을 요한에게 보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저가 누구인지 알아오라는 것이었지요. 요한에게 간 그들은 묻습니다.‘네가 누구냐?’이 물음에 대한 요한의 증거(證據)가 20절부터 질의 답변 형식으로 시작 됩니다.


 20절“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절“또 묻되‘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가로되‘나는 아니라.’또 묻되‘네가 그 선지자(先知者)냐?’대답하되‘아니라.’-”

 ‘드러내다’라는 말은 ‘안에 있는 물체나 생각을 밖으로 나타내 보인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앞절의‘네가 누구냐?’는 물음에 숨기지 아니하고 드러내어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였습니다. 누가 자세히 묻기도 전에 드러내어‘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것입니다. 참으로 세례 요한의 정직함을 봅니다.

 찾아온 사람들은‘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하는 요한에게 또 묻습니다.‘그러면 무엇, 엘리야냐?’아니면‘네가 그 선지자냐?’그러나 요한은‘아니라.’고 답합니다. ‘선지자 엘리야’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대언(代言)자요,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찾아온 사람들은 ‘네가 이런 엘리야 같은 사람이냐?’ 하고 물은 것입니다. 그러나 대답은‘아니라’였습니다.


22절“또 말하되‘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여기에서 ‘묻는’ 뜻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돌아가 대답할 답을 달라’는 읍소형 물음입니다. 보기에 참으로 딱한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신앙과 정신을 보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 곧 위정자, 종교지도자들과 각종 기득권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때문에 지금 비상이 걸려 안절부절하고 있는데, 제사장과 레위 인들은 왜 심부름을 갔는지조차 분별 못하는 맹인들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전도자들을 향하여 이미 5-60년 전에 “외치는 자 많지만, 생명수는 말랐어라.” 하며 개탄한 선각자가 있습니다.


 23절“가로되 ‘나는 선지자(先知者)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主)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19절에서부터 시작된 문답 끝에 세례자 요한은 23절에서 명확한 대답을 하게 됩니다.나는 선지자(先知者)이사야의 말과 같이즉,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이40:3)한 대로 ‘주(主)의 길을 곧게 하려고 광야에서 외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주(主)의 길을 곧게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주의 길을 바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바르게 소개하려고 왔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다’ 광야는 자연의 상태입니다. 그곳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인간들의 생활의 소리가 없는 곳입니다. 거짓을 외치는 자는 인간들이 떠들썩한 번화한 도심의 거리를 무대로 삼는데, 세례자 요한은 인간들이 없는 조용한 광야에서 ‘귀 있는 자는 와서 들으라!’고 외친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고정(固定) 관념(觀念)을 깨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고정 관념에 종이 되어 있다고 하여도 과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앙(信仰)의 개혁자(改革者)들은 중요한 고비마다에서 고정 관념을 깼습니다. 이 고정 관념을 깨는 것은 개혁자들의 하나같은 공통점(共通點)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대표적(代表的)인 개혁자(改革者)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지시로 골육(骨肉)의 형제(兄弟)를 떠나게 되는데(창12:1), 오로지 하나님 말씀만을 믿고 고향을 떠나는 일이 고정 관념을 깨는 일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골육의 형제를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였을까요? 그것은-떠나지 않으면 우상(偶像) 밖에 모르는 골육(骨肉)의 형제(兄弟)들의 고정(固定) 관념(觀念)에 ‘유일신(唯一神) 신앙(信仰)’이 압사(壓死)되고 말 것이라는 깊은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나는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고 하면서 자기(自己)의 관념(觀念)을 수호(守護)하려고 스데반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사도행전 7장 참조). 그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내가 자랑한 유대인과 바리새인의 권위(權威)를 배설물(排泄物)로 여기노라(빌3:8).고 하면서 고정 관념을 깼습니다.

 마틴 루터 역시 중세기의 암흑같은 로마교회의 신앙에서 어느 날 성령님이 보여 주심으로, 죄(罪)를 면(免)해준다는 ‘면죄부(免罪符)를 사고파는 시각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류가 구원 받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이때 루터가 고정 관념을 깨지 않았다면 종교 개혁은 없거나 훨씬 늦어졌을 지도 모릅니다.

 일본의 선각자 우찌무라 선생도 제도와 의식적인 종래의 교회에서 ‘제도와 의식의 타파’라는 무교회를 들고 나와 ‘제도(制度) 의식(儀式)의 고정 관념에서 탈피하여 가정으로 돌아가는 교회’를 역설하였습니다.

 그러나 개혁자들이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하나 같이 핍박(逼迫)의 고통(苦痛)이 따랐습니다. 바울 선생의 “내가 율법(律法)을 말하면 왜 핍박(逼迫)을 받겠느냐? 오직 새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야기함에 따르는 필연(必然)으로 받았다.”고 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겠습니다.


 마틴 루터가 1523년에 종교개혁을 하고, ‘존 밀턴’이 태어난 1608년 사이에는 80여 년이란 시간적 공간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잉글랜드의 프로테스탄트 사이에는 정신(精神) 강령(綱領)이 있었는데 그것은 “진보적(進步的) 진리(眞理) 추구(推究)와, 진보적 진리가 발견(發見)되면 듣고 토론(討論) 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 특히 한국 무교회와 일본 무교회가「대속(代贖)의 신앙(信仰)」에 대하여 예수 당시(當時)의 바리새인들보다 더욱 지독한 바리새인이 되어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이미 정해져 있는 틀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말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영국(英國)의 존 밀턴은 벌써 17세기에 “종교 문제에서의 미심쩍은 사안이 있을 경우 무제한적인 토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밀턴 평전-박상익 저. 푸른역사- 184쪽 참고>.


 「우주적 최대문제」

 이 제목의 글은  <성서 연구> 1911년 10월호에 실린 우찌무라(內村鑑三)

선생의 논문(論文)입니다. 이 논문에서 선생은 “일본에서만은 우리로 그저 웨슬리나 칼빈, 루터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라. 이 나라 ‘일본’에 있어서 구미(歐美) 여러 나라에 존재하는 이교화(異敎化)된 기독교(基督敎)를 그대로 옮겨올 필요란 조금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지금의 한국과 일본 교회가 변할 수 없는 신앙으로 믿고 있는 ‘대속의 신앙’을 이야기한 루터에게 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직행(直行)하라는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들어맞는 진리를 들어맞는 때에 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말하는 자는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뒤에 역사적 필연이 서서 떠밀므로 거기에 밀려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熱)이 있고 권위가 있고 생명력(生命力)이 있다. 역사적(歷史的) 필연(必然)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명령(命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위의 두 예문은 저의 책 <우리가 먹어야 할 생명의 떡>에서 발췌, 인용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500년 전에 마틴 루터의 ‘대속의 진리’는 <무한한 성서>라는 진리항아리에서 발견한 진리인데, 넓은 바다에서 ‘조개 하나’ 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접붙임의 만남’도 ‘조개 하나’ 찾아낸 것과 같습니다.


 인류역사상 최고의 시인이라 할 수 있는 밀턴2) 재림관(再臨觀)에서 “진리의 진보는 재림과 더불어 마침내 신의 섭리가 인간에게 완전히 알려질 때 비로소 끝나게 될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진리 발견이 되고, 또 되어서 어느 누구도 부정 할 수 없는 진리가 발견될 때-즉, 누구나 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님으로 믿게 될 때에 진보는 끝나고,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이란 것이 밀턴의 재림관입니다. 밀턴은 또 “제2, 제3의 끝없는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습니다<밀턴 평전 186쪽, 206쪽 참조>.

 

24절“저희는 바리새인(人)들에게서 보낸 자(者)라”

 앞의 1장 19∼23절까지에서 질문은 유대인들이 보낸 사람들의 것입니다만, 24∼28절까지는 바리새인들이 따로 보낸 사람들의 것입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으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바리새인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25절“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그들은 요한을 향하여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그 선지자도 아니라면서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세례는 그리스도 곧 메시야 하나님이 주는 것인데, 당신은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아니면서 왜 세례를 주느냐는 것입니다. 당연한 질책입니다. 이 항의성 고성(高聲)에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답합니다.


26절“요한이 대답하되‘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세례자 요한이 참으로 명쾌한 답을 말합니다. ‘나는 이렇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너희 가운데 서 있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이 사람은 장차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다. 이 사람은 바로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다’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소개 합니다. 그런데 이 소개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곳에 나타나기 전에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여 ‘메시야를 소개 할 것이니, 내 말을 잘 듣고 있다가 그 사람을 주목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이때까지 세례자 요한도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 할 때였습니다.


27절“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堪當)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그 분은 아직 이곳에 오지는 않았으나, 곧 오실 것이다.나는 그분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 못하는 사람이다.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낮게 낮추고, 그분-곧, 예수 그리스도의 ‘신발끈’을 푸는 일도 자신은 감당치 못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요한 자신보다 더욱 높은 신분의 사람이 그분의 ‘신발끈’을 푸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볼 수가 있습니다.


 28절“이 일은 요한이 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유대인의 대리인과 세례요한 사이의 질의 답변은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던 곳-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성서 공부는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성서공부를 하면서 성서 위에 다른 사람이 쓴 주해서를 참고하여 자신의 생각을 도출(導出)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으로 하는 성서 공부는 아닐 것입니다. 이 방법은 다른 사람이 공부한 것을 보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성서공부는 성서를 거듭하여 읽고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을 하나님께 기도로써 여쭙고, 성령으로 그분에게 가르침 받아야 할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 기도로써 묻고, 그 답을 구하는 방법이 옳은 과정으로 여겨집니다. 늘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심을 받는 것이 성서공부입니다. 성서에서는 이것을 “진리와 함께 즐거워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달에 좋은 책 소개

 <물은 답을 알고 있다> ‘더난 출판’

 지은이 ‘에모토 마사루’

 옮긴이 ‘홍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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