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요한복음 공부 제 64과>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본문 말씀 14:1∼6
본문 분해
1절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2절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3절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절 내가 가는 길을 너희가 알리라
5절 우리가 어찌 알겠나이까?
6절 내가 너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지난번 공부에서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께 ‘어디로 가시나이까?’ 길을 묻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당신이 가실 길을 가르쳐 주는 대신,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말씀하신다.
이에 베드로가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라고 ‘호언장담’을 한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고 물으시면서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덧붙이신다. 그러자 제자들은 근심걱정에 쌓인다. 제자들이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보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하신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이어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그러면 어떠한 처소인가?
첫째는, 너희 즉, 우리가 하나님께 가는 길을 만들러 가신다는 말씀이다.
둘째는, 우리가 갈 곳인 천국! 하나님 아버지 나라를 건설하러 간다는 말씀이다.
3절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절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하시므로 제자들 중에 도마가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하는 도마의 물음에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者)가 없느니라’고 하신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가 곧 (너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를 ‘논리’로 주해하여 성서를 공부한 사람이 없었다. 왜 그리스도敎 2000년 역사에서 이제까지 없었을까? 그것은 성서를 ‘대속(代贖)의 신앙관(信仰觀)’으로만 읽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서를 읽어야 논리정연(論理整然)하게 주해(註解)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십자가상에서 같이 죽는다는 전제로 주해를 하여야 한다. 지금까지 그리스도敎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만 죽는 것으로 주해를 해 왔다. 즉, 남의 죄를 대신 진다는 대속이라는 논리 아닌 논리를 펴온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인 예수 그리스도와 강도-곧, 참! 포도나무와 죄의 사람인 들포도나무가 같이 죽는 주해를 하여야 논리가 성립할 수 있다. 그래야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약속한 천국 열쇠가 보이는 성서가 되는데, 잘못된 주해를 진리인양 믿어왔기 때문에 그리스도敎 20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베드로에게 약속한 천국 열쇠를 보지도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일본의 독립전도자인 우찌무라(內村鑑三) 선생은 이 부분을 논리로 주해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敎 진리는 세상 논리를 초월(超越)이라는 논리 아닌 논리를 내세운다. 즉,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 데서 내세운 ‘초월’이라는 궁색한 논리가 나타났다. 그러나 아니다. 진리를 보지 못한데서 오는 말쟁이들의 억지 논리인 것이다.
본문 공부
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지난달 공부에서 베드로는 목숨을 버리고라도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다짐을 한다. 이에, 예수께서는 네가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다고 하지만,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의 말씀을 하신다. 이같은 스승의 말을 들은 제자들이 근심 걱정에 싸여 있는데, 오늘의 공부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며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위로의 말씀을 하신다. 너희가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지 않느냐.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2절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내 아버지 집에는 너희가 거할 곳이 많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에게 일렀을 것이다. 이제 나는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여기서 ‘처소’는 소재지(所在地) 또는 거처(居處)를 말하는데, 처소를 잠시 살펴보자.
첫째, 너희! 곧 인류가 하나님께 가는 길(道)을 말한다.
아담의 범죄 이후에 아담의 자손인 인류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막혀 있었다. 바울이 지적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는 것을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려서 그 피를 들포도나무에게 주어, 참포도나무와 들포도나무가 하나 될 수 있는 길을 만들러 간다는 말씀이다. 십자가 사건 후에 베드로는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10)고 한대로 십자가 사건 전과, 후의 인류를 분명히 구분되게 설명하고 있다.
둘째, 너희! 곧 우리 인류가 거할 곳(居處)이다. 다시 말하여 우리 인류가 천국에 가는 길과 거처를 만들러 가신다는 말씀이다.
3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너희가 갈 길을 만들고 거처 준비가 끝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 곧 하나님 나라! 천국(天國)에 너희도 있게 하겠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길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와 같이 십자가상에서 죽는 일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받는 일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베드로에게 이야기한 천국 열쇠이다 (천국 열쇠에 대한 공부는 다음에 따로 하겠음).
4절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3절의 길과 거처를 만들러 가는 길을 말씀하시고, 이제 ‘내가 가는 길!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하신다.
5절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내가 가는!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하시므로 도마가 반발성 대답을 한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도마의 반발성 대답에 예수 그리스도의 답변이 오늘 공부의 중요부분이다.
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너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者가 없느니라” (괄호 안은 필자 임의 삽입)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은 앞으로 십자가상에서 이루어 질 일들을 예고하시는 말씀이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도마의 항의성 답변에 예수께서는 ‘내가! 곧 너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대답하신다.
위의 말씀을 성서공부를 하면서 논리로 들여다보아야 참 진리를 볼 수 있다. 그런데 말쟁이들은 성서공부는 하지 않은 채 ‘하늘의 진리는 세상 진리와 달라 논리로는 풀 수 없다’면서 ‘초월(超越)’이라는 해괴한 억지 논리를 내놓고 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논리’에 맞게 주해하려면 역시 십자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인류를 대표하는 강도가 함께 죽는 주해를 하여야 한다. 역사적인 사실로도 십자가상에서 예수 혼자만 죽은 것이 아니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좌·우에 두 강도가 함께 죽었다.
구약의 최고 예언자 이사야는 인류를 ‘들포도나무’로 표현하였다(사5:2).
신약의 주인공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참포도나무’로 표현하였다(요15:1)
또한 너희 인류! 는 가지 곧 참포도나무의 가지라고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는 우주 만물을 경영하는 농부라고 하셨다. 우리 인류가 접붙임을 받아야 가지가 될 수 있다. 증언자 바울은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롬 11:23)
위의 표현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씀들이다.
다시 말하여 2000년 전에 있었던 십자가상의 죽음은 참포도나무인 하나님의 아들과 들포도나무인 죄인 강도가 함께 죽은 죽음이다(롬6:8).
들포도나무가 죽은 것은 자신의 죄악된 몸! 밑동을 절단하여 몸을 멸하기 위함이요(롬 6:6), 참포도나무가 죽은 것은 자신의 가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들포도나무 밑동이 절단 된 곳! 곧 ‘강도의 다리를 꺾고’ (요19:32) 접붙임에 쓰려고 죽은 죽음이다(벧1:2).
다시 말하여 십자가의 사건은 대속의 사건이 아닌 ‘접붙임의 만남’의 사건이다. 이렇게 접붙임의 만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흘린 피를 받을 때에 비로소 베드로에게 약속한 ‘천국 열쇠’가 보인다.
여기서 잠깐 태초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요한복음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에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인류 창조는 만남으로 이루어졌다.
첫번째 창조(創造)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라는 말씀대로 흙과 생기(生氣)의 만남으로 이루어졌다.
두번째 창조는 죄의 굴레를 벗는 갱신(更新)을 말하는데, 참포도나무와 들포도나무의 만남으로 이루어졌다. 들포도나무는 자신이 갖고 있던 몸을 베어버리고, 참포도나무를 영접하는 접붙임의 만남이다. 이 만남!은 우주만물의 생육번성의 원리이기도 하다.
십자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흘린 피를 받기 위하여 들포도나무는 강도의 모습으로 죽고!, 참포도나무의 진액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접붙임 받아! 그 피의 생명으로 부활하니 부활 신앙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가지로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이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1) 십자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흘린 피를 받았으니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다.
(1) 십자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흘린 피를 받았으니,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진리이다.
(1) 십자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흘린 피를 받았으니,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피가 흘러 하늘백성으로 천국 가는 길이 열렸으니 그리스도는 우리의 길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者가 없느니라”에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라는 부분이 우리나라 성서와 일본어 성서가 어휘상 조금 다르다.
일본의 성서는 “私を通らなけれ” “나를 통하지 않고는” 이다. 그러나 두 나라 성경 모두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흘린 피의 은혜를 힘입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를 볼 수도 없고, 하늘나라에 갈 수도 없다.
천우 예배모임 안내
때 : 매월 두 번째 일요일 오전 10시 30분
곳 : 스피치와 변화 4층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6가 1-15번지 (영등포 시장 로터리)
1부 예배모임 사회 : 임효성
말씀 하시는 분 : 이기영 목사님, 한장희, 임중기.
2부 신앙 간담 사회 : 정인순
연락처 : 정인순 (010-3768-8865) 임중기 (010-6346-3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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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공부 발표 2014년 12월 10일 (비매품)
E-mail : imjoongki@hanmail.net http://cafe.daum.net/1000wooo
電話 010-6346-3736 요한복음공부 발표인 임 중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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