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공부

누가 예수 그리스도인을 핍박하였던가?

임중기 2015. 8. 6. 19:28

< 요한복음 공부 제 71과>

 

누가 예수 그리스도인을 핍박하였던가?

 

본문 말씀 16:1∼4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黜會)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者)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例)라' 하리라.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본문 분해

1절 너희로 실족당하지 않게 하려 함

2절 너희를 죽이는 자들의 착각

3절 아버지와 아들인 나를 알지 못한 때문

4절 나의 말을 기억나게 하려함

 

누가! 예수 그리스도인을 핍박하였던가?

 사람들은 통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사람, 또는 무신론자(無神論者)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敎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곧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人들을 핍박하고 죽였다.

 

 유대교를 보아도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사람들은 유일신(唯一神)인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유대인들이었다. 예수님 사후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초대교회 교인들을 핍박한 자들도 제사장들이었다. 하지만, 저들의 하수인이었던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예수를 믿게 되고, 이름도 바울로 바꾸어 그리스도교의 전파자가 되었다.

 

 중세기에 와서는 인류역사에서 소름끼치는 그리스도인 핍박이 개혁자라고 하는 ‘칼뱅’이라는 살인마(殺人魔)에 의해서 저질러졌다.

“칼뱅의 예정설에 공공연히 반대한 한 남자는 도시의 거리를 끌려다니면서 피가 날 때까지 채찍질을 당하고 난 뒤 화형에 처해졌고, 술에 취해 칼뱅을 욕한 어떤 출판업자는 불타는 쇠꼬챙이로 혀를 찔린 후 도시에서 추방당했다. 자크 그뤼에라는 사람은 칼뱅을 위선자라고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고문을 받은 후 처형당했다. 어떤 시민은 ‘칼뱅 선생님’ 이라고 부르지 않고 ‘칼뱅 씨’ 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이런 사례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칼뱅이 제네바에서 사실상의 통치자로 있던 처음 5년 동안 이 도시에서 칼뱅을 의심했다는 혐의로 13명이 교수대에 매달리고, 10명의 목이 잘렸으며, 35명이 화형당하고, 76명이 추방당했다.”

이 때에 “종교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신학자 세르베투스가 화형에 처해진 것은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칼뱅의 세르베투스 처형은 볼테르의 말대로 개신교에서 일어난 최초의 ‘종교적 살인’ 이었다. 그것은 개신교 본래의 이념을 부정한 사건이었다. 사실 ‘이단자’ 라는 개념 자체가 개신교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 개신교는 모든 사람에게 성서 해석에 대한 자유로운 권리를 인정했다.”박상익 교수의 ‘나의 서양사 편력’ (종교가 권력이 될 때 얼마나 무섭게 변질되는가) 중에서ㅡ

 

  이러한 교단의 핍박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교회 안에만 하나님이 계신다’는 기성 교회들의 폐해를 넘어서자는 무교회에서조차도 이런 핍박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한국 무교회는 ‘임중기의 진리(眞理) 발견(發見)’을 ‘이단시’ 하여 신앙적 절교(絶交)를 선언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뿐만 아니다. 자신들끼리 모여 “임중기가 왜 선생인가?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장사치에 불과하다”라고 했는지 한동안 성서잡지들을 보내올 때에 겉봉에 ‘임중기 선생님’ 대신 ‘임중기님’이라고 표기하여 잡지가 오기 시작했다. 내가 언제 나의 대한 호칭을 선생으로 해달라고 저들에게 말하였던가?

 

 구약시대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고,/다시는 벧엘(수도)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왕의 궁임이니라./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 양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아모스 7:12-15)

 

 아모스는 ‘변방으로 가서 예언하라’고 압박하는 아마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선견자가 아니요, 목자요 뽕나무를 기르는 농사꾼이라’고. 나는 아모스가 왜 그렇게 말하였는지 알 것 같다.

 

 우편물에서 나에 대한 호칭이 바뀐 지 6년이 지난 요즘에 어떤 우편물은 ‘님’이라는 호칭 대신 ‘선생님’으로 고쳐 보내와서 씁쓸한 웃음을 짓는 때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후 제자들의 안전이 염려되어 훗날에 있을 일들을 미리 말씀해 주신 것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은혜로, 감사와 감격으로 공부를 하여야 할 일이다.

 

 오늘 공부는 예수께서 당신 사후에 있을 제자들-그리스도인들에게 닥쳐올 고통을 아시고,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인 자신을 알지 못한 저들이 행할 극악무도함을 예언하는 가르침이다. 이런 일이 있을 때에 자신의 말을 기억하여 그 핍박을 피해가라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잘 못 믿으면 살인마가 될 수 있고, 죽어서 천국에 가기는 고사하고 지옥 밑창에도 못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들이 너희를 핍박하는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믿는 일이다. 그 생명! 창조주의 생명을 받는 사람들이 믿는 일이다.

新 요한복음 공부는 창조주 아버지와 그 아들로 오신 우리의 생명의 근원을 영접하여 접목으로 생명을 받은 사람!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者들이 한 혈통의 아버지를 아버지로 불러야 한다는 것을 알아가는 공부이다.

 

본문 공부

1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예수 그리스도 사후에 일어날 일을 예고하는 말씀이다. 왜? 핍박하는 자들에게 실족! 곧 죽음을 당할 수 있기에 하신 말씀이다.

 

 2절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黜會)할 뿐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者)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例)라 하리라.”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아니라’ 여기서 ‘사람들’은 누구인가?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믿으니 같은 형제요 자매라고 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너희를 출회(黜會)! 모임이나 단체 또는 나라에서 쫓아낸다는 말이다.

거기에다 출회(黜會)뿐만 아니라, 저들이 생각하기를 너희를 죽이는 일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예(例)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절대로 전쟁을 반대하는 사고(思考)와 평화주의 사람!

−사람을 죽이는 일에 절대로 ‘아니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

−인종 차별을 하지 않는 사람!

−동식물의 생명의 가치를 알고, 더불어 사는 사람!

위의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전에 어떤 분은 ‘북한 사람들은 모두 마귀 새끼’라고 하며 ‘다 죽여 없애야 한다’고 열을 올리는 것을 보았다. 물론, 육이오를 겪은 세대에서 북한 사람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로 보고 하는 말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류 갱신의 사랑을 알지 못한데서 오는 무서운 오해가 아닐까.

 

 3절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참으로 간단명료하다. 앞 절에서 일어날 일들은 우리 인류의 생명의 근원이신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으면, 제일 먼저 변하는 것이 가치관(價値觀)이다. 전에는 들풀 한 잎이 가치가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근원을 알고 그 생명의 마음눈으로 보면 그 풀잎 하나도 무한한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하물며 사람의 생명에 있어서랴!!!

 

 4절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의 의미를 제자들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신다.

첫째 : 너희가 훗날 핍박을 당하게 되면 내 말을 기억하여 그 핍박을 슬기롭게 피해가라는 말씀이다.

둘째 : 너희들에게 처음부터 이런 말을 하지 않은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동안에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오늘 본문 내용을 잘 살펴보면 아버지가 본향에 가시기 전에 하시는 유언의 말씀 같기도 하다. 어린자식들을 두고 가는 아버지의 마음이 이러리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