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공부

요한복음 공부 6년 기념 특집!

임중기 2015. 4. 19. 18:41

< 요한복음 공부 6년 기념 특집>

 

요한복음 공부 6년 기념 특집 목차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어떤 교회였던가? ---- 2

(2) 하나님의 우주만물 창조와 구원의 진리는 만남!---------6

(3)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7

(5) 육백년 동안 그리스도敎 진리 발견이 정지 되었다 -------8

(6) 성서와 사람! 땅덩어리는 유기체이다 ----------------10

(7) 천우 예배모임 안내 ----------------------------12

 

 요한복음 공부를 시작한 지 6년이 되었습니다. 그사이 은혜 안에서 공부 할 수 있게 해주신 주 하나님께 한없는 감사와 찬미를 올리며, 그동안 같이 해주신 여러 선생님, 형제자매님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요한복음 공부 6년 기념 특집>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어떤 교회였던가?

 마태복음에서는 베드로가 수제자로서 세상 사람들보다 일찍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된다. “내가 누구냐?”는 예수의 물음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 하고 대답한다. 스승 예수를 정확히 본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계의 말씀을 하신다.

 

 위의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이 말은 곧 네가 땅에서 ‘진리를 말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서도 진리가 풀리지 않는 다로 주해(註解)한다.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너! 베드로가 땅에서 진리를 풀어 말하면, 그 진리! 로 너희가 하늘나라에 가는 진리도 풀리리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접하면서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위의 말씀에서 천국 열쇠를 받은 베드로지만 스승으로부터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예고의 말씀을 들었고(요한복음 공부 제63과), 실제로 부인을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려 죽으신 후 2000년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도 ‘이런 교회가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교회’라고 말하는 증언자는 없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왜 예수께서 말씀하신 교회는 없을까? 그것은 이제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교회를 증언하는 신앙의 증언자, 신앙의 개혁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진실로 세상이, 인류가 성서를 잘못 읽었기 때문이다. 특히 개혁자 루터가 성서를 잘못 읽어서 베드로에게 약속한 ‘하늘 가는 열쇠’를 찾지 못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자신의 능력으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제자들과 모친과 나누어 마시고, 예루살렘 성전을 확청하시는데, 가나 혼인잔치에서 먹었던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피인 포도주를 마시고 거듭난 사람들-곧, 제자들과 함께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예루살렘 성전 확청을 하신다. 이것은 새로운 성전을 짓기 위하여 옛 것을 헐어버리는 의미이다. 그리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다.

 

 성전을 허는 이유는 세상의 옛것인 아담의 자손들이 세운 기존(旣存)의 성전을 헐어버리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운 성전을 십자가상에서 세우시기 위함이다. 이 교회가 바로 곧 농부인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성전! 교회이다.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십자가상에서 흘린 피를 인류라는 들포도나무에게 주어 그 피를 받은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말씀이다.

 

 증언자 바울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주신)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 20) (괄호 안 필자 삽입)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증언한다. 죄의 몸! 죽이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강도의 모습으로 죽고, 나를 사랑하사 자기 생명을 주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을 한다.

 

 즉,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어, 일인(一人) 일교회(一敎會)이다. 一人 교회란 그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즉,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이니 이는 바로 ‘접목되어 있는 사람’이다(요 1:12). 하나님이 농부로서 세우신 교회는 “음부(陰府)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음부’(천년의 악령을 쓴 류화의 전설과 같은 기운)도 이기지 못하는 교회이다. 왜 천년의 악명 높은 악귀도 이기지 못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피! 흘림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예배하라고 하신가? “이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하시고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6: 21,23 어느 장소 성전! 교회가 아니고, 성전(聖殿) 된 몸으로 그리스도인이 서 있는 자리가 곧 예배의 장소이다.

 

 증언자 바울 선생은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聖殿)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6:16)고 하였으며, 또한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肢體)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5)고 하였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인간의 의지, 믿음, 마음의 다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것 같이 말하였지만, 그러한 일들이 자신의 세 번이나 부인하는 실패의 체험을 통해 사람의 마음이 참으로 부질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의 배반을 통해 뼈를 깎는 아픔! 약행(弱行)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비애감을 철저히 알게 된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세우신 교회는 ‘사람들이 세우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농부로써 세우시는 교회’란 것을 철저히 알게 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한국어 성서와 일본어 성서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요한복음 1장 29절을 볼 때 한국어 성서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인데, 일본어 성서는 “세상 죄를 잡아 죽이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곧 아담의 후손을 잡아 죽이는 것으로 되어 있다.

“その翌日 ヨハネは 自分の方へイエスが来られるの見て言った 見よ世の罪を取り除く神の小羊だ.”

여기에서 罪を取り除く 이 부분의 우리말 성서는 ‘죄를 지고 가는’ 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罪’を(죄를) ‘取り’ (도리)는 한국어로는 얻다, 받다, 잡다 등의 뜻이다. 한마디로 이야기 하면 ‘손으로 잡다’ 즉, ‘죄를 잡아’로 번역하면 될 것이다.

‘除く’ (노죠꾸)는 ‘없애다, 치우다, 제거하다, 죽이다’로 번역 할 수 있는데, 전체를 번역하면 “죄를 잡아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본다. 죄를 잡아 없애는 일을 농부인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상에서 로마 군병에 의하여 못을 박아 죽임을 당하는데, 강도와 예수의 죽음의 의미가 각각 다르다것이다.

 

 인류의 대표인 강도는 강도의 죄 된 몸을 제거하기 위하여 위의 말씀처럼 “죄를 잡아 제거하는” 의미의 죽음을 당하는 것이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어린양으로서 희생양의 피-곧, 참포도나무의 가지를 하나님이 취(取)하기 위하여 죽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신 것은 너! 베드로야 네가 나! 참포도나무와 인류! 들포도나무가 십자가상에서 같이 죽어! 만남의 연결 고리 열쇠를 네게 주나니 네가 진리의 말! 천국 열쇠의 역할의 말! 진리의 말을 찾아 ‘십자가의 사건’을 풀어 말하라는 당부다.

 

 이리하여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한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를 베드로전서 첫머리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1장 2절)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흘린 피를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者)들에게 편지하노니!

위의 편지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흘러들었다는 이야기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그리스도와 나 자신과의 연결고리, 열쇠이다.

 

 이는 바로천국을 들어가는 열쇠’이다. 이렇게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받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者)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한 증언은 베드로 외의 어떤 증언자들도 하지 않은 말이다. 이 말씀이 바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열쇠로 풀어 쓴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내 마음에! 내 몸에 있어 하늘의 백성으로 거듭난 하늘의 시민권을 갖게 된다.

 

 베드로는 이어서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1:23)

‘씨’는 곧, 위의 피를 알기 쉽게 표현한 말이다. 베드로는 또 다시 놀라운 말을 한다.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는 자(者)니라.”(괄호 안은 저자 삽입)

 

 정말 그렇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흘러들면서 접붙임 되어 참포도나무가지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으니 이가 바로 그리스도人이요, 그리스도敎이다.

 

 바울 사도 역시 로마서에서 수를 헤아릴 수 없도록 거듭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와 계심을 이야기하였다. 로마서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같이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다(롬 6:3, 6:5, 6:6, 6:8, 6:11, 8:11 등 로마서 전체와 바울 사도의 서신서 전체).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敎會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교회를 세우다 보니 베드로의 성당을 만들고, 거기에 얹어서 교황청을 만들어 스스로 교황에 오르곤 한다.

 

 개신교(改新敎) 또한 다르지 않다. 교단이라는 것이 있어 교단의 총회와 당회장을 두고, 많은 교회를 거느린다. 이 모두가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와는 상관이 없는 교회지만, 사람들은 육의 눈에 보이므로 진정한 교회로 알고 섬기고 있다.

 

 

하나님의 우주만물 창조와 구원의 원리는 만남!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인류를 상징하는 좌·우의 강도와 같이 십자가의 고통으로 죽은 지가 2천여 년이 지났는데도 세상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 모양 이 꼴로 죄에 물들어 있다.

 

 왜 이렇게 변화가 없는가? 그것은 인류! 곧 종교 개혁자들이 성서를 바르게 읽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창조자 하나님은 만남의 원리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고, 인류의 구원도 만남의 원리로 이루어 놓으셨으나, 하나님이 이루어 놓은 성서를 종교 개혁자들이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첫번째 인간 아담의 창조는 ‘흙과 하나님의 생기의 만남’으로 창조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生氣)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생령(生靈)이 되었다”고 하였으니 이는 곧, ‘흙과 하나님의 생기의 만남’이다.

 

 두번째 창조는 들포도나무인 인간과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접목이다. 예수 그리스도-즉, 참포도나무가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그 피가 들포도나무-인간에게 흘러들어 ‘접붙임’을 받게 되면서 강도의 육신은 죽어 없어지고,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흘러들어 접목되면서 참포도나무 가지로 살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인류의 갱신도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와 인류인 들포도나무가 만남으로 생겨난 새로운 피조물이 그리스도인이다.

 

 앞에서 살핀 대로, 인류를 구원하는 두번째 창조사업도 하나님이 농부로써 하신 일들인데, 천지창조의 원리와 조금도 다름없이 만남으로 이루어졌다. 만남으로 이루어진 것이 어디 인류의 재창조뿐이겠는가? 만물이 다 만남으로 이루어져서 생육 번성하는 것을 자연과학으로 살펴볼 수 있다. 즉, 만남이 없다면 단 하나의 생성(生成)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이다.

 

 그런데, 종교 개혁자 루터와 칼 빈은 인류의 구원이 ‘대속(代贖)’이라는 ‘접붙임의 만남의 원리와는 전혀 다른 논리로 인류 구원을 이야기해 왔다. 이러한 결과, 자연과학은 빛의 속도처럼 빠르게 발전하고 있건만 그리스도교(敎)의 진리는 2천년 전이나 칼빈 이후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 없이 계속 대속(代贖)만을 진리로 내세우고 있으니 과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이라면 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의 자연과학은 정말 빛의 속도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데, 인류의 구원론은 루터의 대속론, 칼빈의 대속론, 우찌무라의 대속론, 김교신의 대속론등 대속론에서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이 된다고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

 자연과학과 통하는 십자가의 진리는 ‘접붙임의 만남’이다.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성서는 자연과학과 통하는 성서를 읽어내야 한다.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만남’의 원리로 창조하셨고, 만물의 영장인 최초의 인간 아담도 ‘흙과 하나님의 생기의 만남’으로 창조하셨으니 이 만남의 원리로 인류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인류 구원론이 곧 바울의 구원론이자 베드로의 구원론이다. 그런데 개혁자들이 성서를 잘 못 읽어 오늘과 같은 대 혼란의 세상이 온 것이다.

 

 자연과학과 통하는 인류 구원론과 인류 갱신의 성서 진리를 찾아 읽어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더욱 놀라움의 전지전능의 창조주(創造主) 하나님으로 우뚝 서 계시는 것이다. 하나의 ‘만남’의 원리로 인류와 우주만물 창조주로 우뚝 서 계시고, 하나의 그 원리로 죄악에 물든 인류를 갱신하여 하늘 백성으로 다시 살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어느 누가 고개를 숙이지 않으랴?

(1) 하나의 만남의 원리로 아담 창조

(1) 하나의 '접붙임의 만남'의 원리로 인류 재창조

(1) 자연의 우주만물이 만남의 원리로 생육 번성됨

(1) 모든 동식물이 만남으로 생육 번성됨

(1) 의술 또한 만남의 원리로 치유함 (현대 의학에서 외과 수술은 모두 ‘접목의 만남’의 수술이다. 병든 부위를 잘라내고, 병들지 않은 장기를 떼어서 이식하는 수술이 곧 접목이다. 병들어 못 쓰는 생명을 살리는 것 또한 접붙임의 만남의 원리임)

 

 

육백년 동안 그리스도敎 진리 발견이 정지됨

 나는 2006년 휴전선 이북에 있는 금강산을 둘러볼 수 있었는데, 그때 북한의 사회 발전이 정지(停止)되어 있음을 보았다. 특히 북한 농촌이 그렇게 보였다. 1960년대의 남한의 농촌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하였다. 발전이 정지되어 있는 것은 북한 농촌만이 아니다. 세계 역사에서 그리스도敎의 眞理 發見 또한 육백년 동안 정지되어 있음을 본다. 왜 그리스도敎의 진리 발견이 정지되어 있다고 보는가?

 

 성서 공부하는 사람이 성서를 깊이 보고 생각하여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해 내놓는 것이 성서 공부인데, 성서공부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깊은 생각을 내놓기보다는 어거스턴, 마틴루터, 내촌감삼 선생 등 선인들이 공부하였던 것을 그대로 답습하여 내놓으면서 성서를 공부한다고 한다. 그러나 아니다. 자신이 본 성서보다는 남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기 때문에 모두가 비슷비슷하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진리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마틴루터의 종교개혁 이래 육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하였는데 그리스도교 진리만 정지되어 있다. 과학은 수만 리 떨어진 곳에서도 무선화상 전화를 하는 시대로 발전하였으나, 그리스도敎의 진리는 육백년 전의 생각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을 하고 있다. 요한 웨슬레도, 워치만도, 내촌감삼도, 존 번연도 하나같이 루터가 공부했던 것을 답습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사정이 이러하기에 21세기 서방세계는 그리스도敎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진리를 과학이 인정할 때에 그리스도교는 더욱 발전할 수 있을 테지만, 과학이나 철학 쪽에서는 십자가의 대속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마틴 루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인류를 위하여 죽었다고 본 것은 잘 보았다. 그러나 그 죽음을 대속으로 본 것은 잘못 본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반쪽 진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죽음은 맞는데, 그 죽음이 대속 의미가 아니고, “접붙임으로의 만남”의 죽음이다. 곧 인류와 같이 죽는 죽음이다. 이리하여 예수의 십자가 좌·우에 두 사람이 강도! 죄인의 모습으로 죽는다. 예수의 십자가 좌·우 에 강도가 죽는 것은 인류가 죽는 것의 표현이다.

예수의 십자가 좌·우의 두 사람은 인류를 대표하는 죄인의 상징으로,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 십자가 죽음의 의미이다.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죄를 멸하기 위하여 죽고, 예수의 죽음은 가지를 잘라 그곳에 접붙임하는 죽음이다. 이렇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예수와 같이 죽었다고 역설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6:5)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6:8)

 

 예수의 죽음이 대속이라면 예수만 죽고, 우리는 죽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바울은 같이 죽었다고 수 없이 역설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접붙임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괄호 안은 필자 삽입)

심지어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말하고 있다.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죽었으면 우리는 죽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대속의 의미가 아니고 ‘접붙임의 만남’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엄연한 접붙임의 죽음인데도 계속 대속으로만 이야기함으로 서양의 그리스도敎는 차츰 없어지고 있다. 왜 서양의 그리스도교(敎)가 없어지고 있는가? 그것은 과학이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건만 한국과 일본의 그리스도敎가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것은 가정으로 돌아가자는 무교회론에 영향을 받아 이렇게라도 살아있다.

 

 그러면 어떻게 성서공부를 하여야 그리스도교 진리가 발견이 되는가? 예를 들어 보자. 어느 사람이 무화과나무에 대해서 공부한다면 그 무화과나무를 자세히 보고, 그 생긴 모양을 깊이 생각하며, 생각했던 것을 글로 잘 표현하는 것이 무화과나무에 대한 공부일 터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본 성서를 그대로 표현하여야 한다. 그런데 자신의 생각은 접어둔 채 누구는 이렇게, 누구는 저렇게 했다고 하면서 남의 공부를 복습이나 답습하는 것이 진정한 공부로 착각한다면 진리가 보일 리 없다.

 

 선글라스 (sunglass)로 세상을 보면 한 가지 색(色)으로만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리를 대속의 信仰觀으로 보면서, 선글라스로 보는 것과 같이 대속이라는 신앙관으로만 주해(註解)하여 왔다. 특히 그 색만이 정통(正統) 신앙이라고 하면서 조금이라도 다른 새로운 眞理는 이단(異端)으로 내몰아쳐 왔다.

正統 信仰!! 정통이라는 테두리를 만들어 여기서 벗어나면 異端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敎에서 제일 못된 말이다. 정통은 교단(敎團)에서 자신들을 위해 철망을 두르고,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올가미를 매는 못된 일이다. 그런데도 성경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종종 정통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이 韓國 그리스도敎의 現實이고, 世界 그리스도敎의 실상(實狀)이다.(요한복음 공부 제63과에서)

 

 

성서와 사람 땅덩어리는 유기체이다

(1)성서는 어느 곳을 읽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와 연관되어 있다.

(1) 사람의 몸은 어느 곳이나 상처가 나면 피가 나온다.

(1) 지구 땅덩어리도 어느 곳이나 파면 습기와 물이 나온다. 이것은 살아 있는 有機體이기 때문이다.

(1) 성서는 흙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기록하였다.

때문에 성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선인들의 공부하였던 것들은 참고는 하되 변할 수 없는 진리로 생각지 말고, 사람의 몸과 땅에서 자라는 동식물을 참고로 하면 잘못이 없다. 선인들이 공부한 결과들은 제 각기 시기와 생각들과 신앙의 양이 다르기 때문에 무조건 믿고 따를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교개혁 이후 육백년 동안 루터의 성서공부를 교과서로 보아 왔다.

 

 왜 성경말씀과 사람, 땅덩어리 지구를 有機體적으로 보는가? 그것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어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세기2:7)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 창조 때에 불어넣어 주신 생기로 지금까지 숨을 호흡하기 때문이다. 사람만 생기! 공기 바람으로 호흡하는 것이 아니다. 만물이 이 생기 곧 공기 바람으로 숨을 호흡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불어넣어 주신 생기로” 인류와 만물은 호흡하며 살아 있다. 성경말씀은 그것을 인류에게 나에게 여러분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래서 성경말씀과 사람, 자연은 有機體이다.

 

 성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성서를 깊이 읽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면서 자연을 볼 때 모든 자연이 성서 진리를 보이고, 가르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마틴 루터 이후 육백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성서를 공부한다고 하면서 성서공부는 하지 않고, 루터 신앙만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루터의 신앙이 진리로 자리를 잡고, 더 나아간 진리의 발견은 정지되어 있는 것이다. 루터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성서공부를 하였는데 루터 신앙에서 벗어나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는 이단으로 내몰림을 당했다. 루터 신앙에서 벗어나지 않는 공부가 정통 성서공부로 치부되어 왔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들인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성서공부가 루터 신앙을 답습하는 데에 머물고 있다.

 

 왜 루터의 신앙관에서 벗어나는 공부를 하면 이단으로 내몰았는가? 그것은 기득권자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술책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무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무교회라고 하면 기득권층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소위 「무교회」 이름으로 잡지를 내고, 무교회 이름으로 성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무교회 내에서 선생으로 추앙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놓지지 않으려고 정통 신앙을 고집하며 새로운 말을 하는 사람들을 내몰고 있다. 이러한 생각들 때문에 육백년 동안 새로운 진리가 발견되지 못한 채 정체되어 있다. 그러나 아무리 기득권자들이 정통신앙을 수호하려고 하여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진리 발견은 누구도 막지 못한다. 당신이 보이시는 진리를 당신이 밝히시기 때문이다.

 

 

천우 예배모임 안내

 

 때 : 매월 두 번째 일요일 오전 10시 30분

: 스피치와 변화 4층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6가 1-15번지 (영등포 시장 로터리)

 

1부 예배모임 사회 : 임효성

말씀 하시는 분 : 이기영 목사님, 한장희, 임중기.

2부 신앙 간담 사회 : 정인순

 

 연락처 : 정인순 (010-3768-8865)  임중기 (010-6346-3736)

매월 (2번째 일요일) 오전 10시30분시 예배모임이 있습니다.

 10시 30분 오시는 대로 돌아가며 성경을 몇 귀절씩 읽고 11시에 시작합니다. 모임이 끝나면 점심을 같이 하고 해산합니다.

 

지하철 1호선 이용시 : 영등포역에서 하차 후 (롯데백화점 방향)으로 나와 신세계 백화점과 경방필 백화점을 지나 영등포시장 로터리 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스피치와 변화’ 간판이 보임

지하철 5호선 이용시 : 영등포시장역에서 하차, 4번 출구로 나와 200미터 직진 후 우측 모닝글로리 문구점을 끼고 우회전 하면 ‘스피치와 변화’ 간판이 보임

주차장은 ‘영남 주차장’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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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공부 발표 2015년 4월 10일 (비매품)

E-mail : imjoongki@hanmail.net http://cafe.daum.net/1000wooo

電話 010-6346-3736 요한복음공부 발표인 임 중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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