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공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2)

임중기 2011. 8. 10. 20:30

<요한복음 공부 제27과>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2)

본문 말씀 6:34∼40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본문 분해

34절 떡을 항상 주소서

35절 내가 곧 생명의 떡

36절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37절 내게 오는 자는 내어 쫓지 않으리라

38,9절 내가 온 것은 마지막 날 다시 살리려는 것

40절 아버지의 뜻

 

예수의 떡을 먹는 방법

 예수를 믿는 자(者)란 생명의 떡을 먹듯 예수를 자신의 생명의 근원으로 영접하는 자! 즉 접붙임을 하나님께 받은 자 안에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오시여 계신다는 말씀이다. 이미 2천년 전에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이 농부로서 그 일들을 하셨다. 우리 인간들은 성서를 읽고 진리를 접하고 이 사실들을 깨달음으로 내 안에 접붙임으로 오신 그 분을 알게 역사 하신다.

 

 하나님의 품속에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가 아들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어 모든 믿는 者 안에 계시므로 이제는 더 이상 목마르지 않고 진리의 갈급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인류 모두에게 접붙임을 하였지만, 진리를 깨닫고 믿는 者는 구원이 되고, 믿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고,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39-43) 여기에서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 받은 행악者를 본다.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진리와 더불어 감사와 감격으로 늘 찬미가 벅차오르는 것을 말씀하신다. 내 영혼이 당신의 생명으로 화하여 당신과 하나 될 수 있어 나의 생명, 나의 영혼이 감사가 넘치나이다.

 

본문 말씀 공부

 34절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유대인들은 떡의 의미를 생각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양식을 얻기 위하여 예수께 말한다.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그렇다면 진정한 ‘생명의 떡’의 의미는 무엇인가? ‘생명의 떡’이란 참포도나무 가지로, 접붙임의 가지로 영접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을 창조하실 때에 극상품 포도나무로 만드셨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으로 들포도나무로 전락하여 온 인류가 다 들포도나무로 되고 만 것이다. 에덴에서의 추방이 곧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뜻한다. 세상을 축소하여 들포도나무 농장으로 생각하면, 포도농장에 들포도나무만 무성하여 있는 것을 하나님이 하늘에서 하나님 품속에 두셨던 참포도나무인 예수를 들포도나무 농장 한 가운데 심으셨다(요1:18). 농장 주인이 하늘에서 가져다 심은 예수! 예수는 참포도나무, 우리 인류는 가지가 되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즉 미구에 다가올 십자가상에서의 하나님의 접붙임에 대하여 상징으로 또는 예고로 하신 말씀이다.

 

 3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절규하는 유대인들에게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하시며 자신을 영접하고 믿는 자는 그 믿음 안에 생명의 근원이 있으므로 영원히 진리에 대하여 갈급하지 않게 된다는 말씀이다.

 

 36절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는 앞 절에 이어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나를 배를 부르게 하는 떡 떼어주는 사람으로만 보았을 뿐, 참 하나님의 품속에 있었던 나의 영원한 생명은 받으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 품속에 있었던 나를 영접하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고 하신다. 왜? 예수는 하나님과 하나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하나인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인 여러분과 나와 하나 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접붙임으로 주셨기 때문이다. 이 일은 농부인 하나님이 하셨다.

 

 37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여기서 참으로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참떡의 의미를 알지 못하여 나를 믿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너희를 나에게로 인도하시면 다 내게로 올 텐데 그 때는 결코 너희를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인도!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 깨닫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참으로 놀라운 은혜의 말씀이다. (우리가 이렇게 성서공부를 하는 것도 은혜로 알게 하시여 공부한다는 말씀이다.)

 

 38,9절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가’ 즉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내 뜻’ 즉, 예수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왔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자신의 몸을 십자가상에서 갈기갈기 찢어 하나님이 접붙임 하시게 순종하는 일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라고도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님은 두 가지 일을 하신다.

 하나, 십자가상에서 자신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하나님이 접붙임 하시도록 순종하는 일.

 둘, 접붙임을 받은 가지-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거듭나게 하는 일-곧, 그리스도의 생명의 부활로 다시 살게 하는 일이다. 가지의 생명! 참포도나무로 살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마지막 날은 언제인가?

 (1) 사람이 육신을 버리고 이 세상을 떠나는 날

 (1) 최후 심판의 날

 위의 어느 날이든 상관이 없다 그런데 현세에서 거듭남의 체험으로 자신이 참포도나무가 되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거듭남의 체험을 했다하여도 인간이 육을 가지고 있는 한 늘 육의 감각을 좋아하여 범죄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위의 두 날을 늘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40절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이 절에서는 앞 절에서의 “하나님의 뜻”을 역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러분과 내가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에서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을 보고, 예수를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면 마지막 날에 거듭나게 하여 하늘 백성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를 자신의 생명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이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품속에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자들이 가는 곳이다. 십자가상에서 이 일들을 이루어 놓으신 것이다.

 

마리아의 처녀잉태

성경에는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할 때 처녀의 몸으로 나와 있다. 인간의 좁은 논리로는 절대 이해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을 기독자들은 논리의 초월이라는 말로 대신해 왔다. 신의 영역에서는 인간의 논리가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에서는 초월이라는 말이 일상화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인류 구원의 논리를 대속으로 보았기 때문에 내세우는 빈약한 논리일 뿐, 십자가의 사건을 대속에서 눈을 돌려 ‘접붙임의 만남’으로 보면 마리아의 처녀잉태는 진리의 논리로 서게 된다.

 

 십자가의 사건을 접목으로 보면 접목은 ‘만남’이다. 십자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좌․우의 강도가 같이 죽음으로써 십자가의 사건은 곧 ‘접붙임의 만남’이 된다. 인류의 구원이 만남으로 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참포도나무라고 하셨다. 왜 예수가 자신을 참포도나무로 이야기하였는가? 그것은 자연을 예로 들어 구원의 논리를 설명하시기 위해 하신 말씀이다. 참포도나무와 들포도나무를 비유로 하여 당신의 십자가 사건을 설명하시기 위함이었다.

 

 증언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감나무로 예로 들며, 접붙임의 능력이 농부인 하나님께 있고, 예수를 참감나무! 인류를 돌감나무로 비유하여, 십자가상에서 돌감나무의 밑동을 잘라내고 참감나무의 가지를 접붙임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포도나무를, 증언자 바울은 참감나무를 예로 들고 있다.

접붙임을 받으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가지가 된다. 예수는 들포도나무인 우리에게 가지를 주려고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려죽으시고, 예수 좌, 우의 두 강도는 인류의 대표로서 밑동에서 절단되어 죽어 없는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지! 곧 피가 흘려들어 접붙임이 성립되어진 것이다. 이것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만남’이다. 다시 말하면 인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심이다.

 

 인류 구원은 만남이며, 인류 창조 또한 만남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곧 흙과 하나님 생기의 만남이다.

마리아의 처녀잉태도 만남이다. 마리아와 하나님의 성령이 강림하여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마리아와 성령의 만남’이 논리에 맞지 않다고 하여 논리 초월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씨앗이 땅에 떨어져 ‘흙과 씨앗의 만남’으로 새싹이 돋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이 없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흙과 만나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라서 논리로써 타당하고, 성령님의 강림으로 인한 마리아의 잉태는 보편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상할 뿐이지만 이러한 일들이 자주 있게 되면 보편적으로 보일 것이다.

 

 처음 사람을 창조할 때에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의 모형을 만드시고 그 모형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된 것은 ‘흙과 생기의 만남’의 결과이다. 마리아의 몸에 성령이 강림한 것도 ‘만남’이다. 또 씨앗이 땅에 떨어져 땅과 만나 새싹이 돋아나는 것도 ‘만남’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흙과 생기의 만남’으로 아담 창조

 (1) ‘마리아의 몸과 성령의 만남’으로 예수 그리스도 잉태

 (1) ‘씨앗과 땅의 만남‘으로 새싹이 돋아남

 (1) ‘죄인인 인류의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흘러들어 만남’이 되어 예수의 생명으로 부활하는 인류 구원

 이 모두가 한 가지 논리로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흙과 사람, 성서는 유기체(有機體)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사람이 만들어진 재료는 흙이다. 마찬가지로 마리아의 몸은 흙으로 되어있다. 이 흙에 성령이 강림하신 것이나 흙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은 같은 논리이다. 마리아에게 성령이 임하여 잉태가 된 것과 인류 탄생은 같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성서 말씀을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계시(啓示)가 임하므로 성서가 기록된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사람이 생존하는데 꼭 필요한 의식주를 땅-곧, 흙이 공급해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흙과 사람, 성서는 유기체(有機體)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논리로 모두 풀 수 있다. 초월이라는 논리 아닌 논리를 사용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대속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접붙임의 만남으로 보면 보이게 된다. 접붙임은 논리이다.

 

 천우 예배모임 안내

 

  때 : 매월 두 번째 토요일 오후 5시 30분

 곳 : 스피치와 변화 4층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6가 1-15번지 (영등포 시장 로터리)

 

 1부 예배모임 사회 : 임효성

 말씀 하시는 분 : 한장희, 임중기.

 

 2부 신앙 간담 사회 : 정인순

연락처 : 정인순 (011-768-8865)  임중기 (010-6346-37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