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처음으로 인정해준 사람
1965년 겨울 나의 부친은 그간에 천식으로 오랜 세월 고생이 많았는데 그 겨울 본향으로 가셨다. 그간에 경제력은 없었지만, 그래도 부친의 죽음으로 우리 식구들은 다 각기 자신들의 일자리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나는 어느 사람의 소개로 ‘금월리’ 대각이란 마을에 남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다. 쉽게 이야기하면 머슴으로 갔었다.
그러니까 1966년 봄에 금월리 대각 마을에 가 있게 되었다. 그 마을에는 초등학교 동급생인 전대섭, 전삼만, 천찬순 등 수인이 있었는데 그들도 중학교는 진학을 못하고 초등학교 졸업으로 학업을 그만 둔 동급생들이다. 처음에는 좀 창피하기도 하였지만, 이들은 나를 참으로 반겨주었다. 그리고 이들과 밤에는 사랑방에서 일도하고 놀기도 하였었다.
그 때에 ‘전동일’ 씨 집에서 살았는데, 전동일씨는 마을에서 참으로 좋은 사람으로 이야기가 되고 있었다. 마을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늘 솔선수범하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사춘기 때에 전동일씨와의 만남을 큰 복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보고 논두렁을 고치라고 일을 맡겨주었다. 겨울에 눈비가 오고 쥐가 구멍을 내고 하여 봄이면 논두렁을 고쳐야 일년 농사일을 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일을 맡겨주신 것이다. 나는 사춘기 때에도 신앙심이 있어, 혼자서 일을 할 때는 주인과 일할 때 보다 더욱 열심히 일을 하였다. 그 날도 놀지 않고 참으로 열심히 일을 하여 오전에 그 논두렁 고치는 일을 다 하고, 오후에는 다른 일을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 전동일씨는 저녁을 먹으면서 야단을 쳤다. 일을 배울 때부터 잘 배워야 한다고 하면서 야단이었다. 네가 하루종일 해야 할 일인데 반날에 하였으니 다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주인이 없어도 하나님이 나를 늘 보고 계신다고 믿고 하나님 앞에서 농땡이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하여 오전에 다 마쳤는데, 가서 보시지도 않고 야단이었다. 다음날 저녁에 어제 논두렁을 잘 고쳤더라 하시며 미안하다는 것이다. 보지도 않고 야단을 친 것에 대한 사과였다.
그 일이 있었던 후 나와 전동일씨는 참으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나는 그를 형님으로 그는 나를 동생으로 하자며 의형제가 되었다.
내가 1969년 서울에 와 돈을 벌어 최초의 개업을 73년 봄에 개업을 하였는데, 서울까지 오셔서 개업을 축하해주고, 사업 실패 때에도 늘 격려하신 전동일 형! 나는 서울에서 있다가 복흥면, 고향에 가면 제일 먼저 가는 곳이 국희종 선생이 계신 교회이고, 다음은 전동일 씨를 찾았다. 복흥에 갈 때마다 그렇게 하며 나는 늘 편지에 형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권면을 하고 하여 (성서신애)지(紙) 잡지와 복음 엽서를 늘 보내주었다.
또한 나는 집이 가난하여 그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열심이 살았다. 그리고 복흥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리하여 내가 돈을 제공하고 농촌에 있는 농가에서 소를 기르면 하는 생각으로 전동일 형께 이야기하여 소를 기를 사람을 알아 봐 달라 하여 소를 사주어 기르게 하였던 일이 있었다. 1977년부터 시골에서는 전동일 형이 나는 서울에서 돈을 제공으로 그 일들이 제법 잘 되어갔는데, 1980년 전두환 독재정권 등장과 함께 소 수입과 소파동이 일어나 소 사주는 사업이 실패로 돌아갔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에게 편지를 주실 때는 동생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도 믿기로 하였네,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편지를 주시기도 하시고, 국희종 선생님이 동계, 하계 집회를 하셨는데 그 때에 모임에 동부인하여 나오시기도 하였다.
그런데 2003년 부인이신 형수님은 대장암으로 본향에 가셨다. 또한 전동일 형님 2004년 위암으로 본향에 가셨다. 1966년에 만나 2004년까지 약40년의 세월 의형제의 연을 맺고 서로가 그 의를 다하였던 전동일 형님은 나에게 인생은 늘 ‘솔선수범’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간 선생이고, 형님이었다. 나는 그 솔선수범을 오늘까지 실행하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