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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재창조하신 왕

임중기 2016. 9. 15. 10:48

< 요한복음 공부 제 84과>

 

                       인류를 재창조하신 왕

본문 말씀 19: 17∼22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쌔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 되었더라.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본문 분해

17절 예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오르시다

18절 예수, 좌우편의 두 강도와 못 박히다

19절 빌라도의 패 ‘나사렛 예수 인대인의 왕’

20절 많은 유대인이 이패를 읽다

21절 ‘자칭 유대인의 왕’

22절 나의 쓸 것을 썼다

 

인류를 재창조하신 왕

 인류 역사상 십자가에서 죽을 죄인을 ‘나라의 왕’이라는 호칭을 붙인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런데 이 왕이라는 호칭은 빌라도의 치기인가, 우연인가? 아니다. 예언자들의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사야는 장차 올 예수 그리스도를 ‘평강의 왕’으로 예언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政事)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奇妙者)라 모사(謀士)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永存)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6)

“자기 땅에 오메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者) 곧 그 이름을 믿는 者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1-12)

사도요한은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땅!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말하고 있다. 이러한 예언의 말씀을 죽어가는 십자가상에서 확인하는 일들이다. 비록 ‘가이사’라는 로마 왕의 자리를 넘보는 죄목으로 십자가에서 죽긴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1)우주만물의 창조주의 왕

(1)십자가에서의 죽음의 피로 인류를 갱신하는 왕

(1)인류를 갱신하는 그들의 ‘평강의 왕

(1) 재창조를 다 이루었다 선언하신 왕

(1) 세계 통용어인 히브리어, 로마, 헬라어로 선포되었던 왕이시다.

 

본문 공부

 17절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예수께서는 ‘가이사의 왕권을 넘보는 정치범’으로 몰려 총독 빌라도 앞에 섰지만, 빌라도의 무죄의 의견과는 다르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장으로 끌려가시게 된다. ‘저희(로마병정)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 그리스도는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는 곳까지 가신다. 가시는 길에 예수께서는 온갖 모욕을 받는다. 뿐만 아니라 로마병정의 채찍을 수없이 맞아 살은 찢어지고 피는 흘러 머리에서부터 발목까지 적시었다. 어린양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모양으로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는 언덕에 도착하신 것이다.

 

 18절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쌔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쌔’

요한복음을 공부하는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장소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거기서 란 성서 기록과 같이 골고다 언덕인가?

여기서 비유적으로 예를 들어 생각해보면 세상 한가운데인가?

아니면 우리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체험으로 이루어지는 일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들포도나무 농장이다. 들포도나무 농장 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포도나무가 심어졌다. 좌우의 강도는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들포도나무로, 들포도나무의 상징(象徵)즉, 들포도나무의 대표이다.

이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좌우의 강도 세 사람이 십자가상에서 죽었다. 그러나 접붙임으로 보면 농장에 있는 들포도나무 전체가 밑둥이 절단 되어 없어지고,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흘린 피가 흘러들면서 새로운 참포도나무로 접붙임 되는 복음이다(벧전1:2).

부활이란 십자가상에서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흘러들어 피의 생명이 새싹으로 곧, 참포도나무 가지로 산다는 말이다(‘가지’라는 뜻은 근본(根本)에서 갈라져 나온 것).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참포도나무! 우리 그리스도인은 참포도나무 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자리 잡은 대속과 속죄의 신앙관으로 보면 예수만 십자가에서 죽어야 대속이나 속죄의 신앙관으로 볼 수 있는데, 십자가 사건은 분명히 예수와 좌우의 강도 등 세 사람이 죽었다. 들포도나무 두 포기! 곧 강도가 죽었는데, 한 강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내림을 받아 자신의 생명체로 믿어 구원에 이르고, 한 강도는 피 내림을 받고도 믿지 않음으로 낙원에 못가는 안타까운 기사가 누가복음에 있다.

바울은 ‘믿음으로 서고’ 곧 살고, ‘믿지 않음으로 끊긴다’ 곧 죽는다고 했다(로마서 11장). ‘믿으면 살고, 믿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19절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빌라도가 십자가에서 죽어갈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패를 써서 붙였다. 내용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으로, 참으로 합당한 이름이다. 위에서 보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왕 중에 왕이시기 때문이다.

 

 20절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왕 중에 왕!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참으로 합당한 칭호다.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예루살렘성에서 가까웠기에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 누구나 읽을 수 있게 ‘히브리와 로마,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고 하였다. 2000년 전 당시의 세계 통용어는 로마와 헬라어였다. 그러니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그곳에 온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다 읽었다는 말이다.

 

 21절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성령의 역사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가 빌라도를 통해 붙여졌는데, 유대인은 그것이 싫어서 빌라도에게 부탁을 한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쳐 써달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 요구를 일축(一蹴)한다.

 

 22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빌라도는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가이사’ 왕권을 넘보는 정치범으로 몰아와서 어쩔 수 없이 죽이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도 부족하여 유대인들은 스스로 왕이라고 하였다고 고쳐 쓰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에 빌라도가 대답한다. ‘나의 쓸 것을 썼다’고.

대제사장과 그 하속들은 얼마나 민망하였을까? 빌라도의 거절에 할 말을 잊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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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공부 발표 2016년 9월 10일 (비매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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