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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 가야바와 베드로 (하)

임중기 2016. 5. 4. 20:34

< 요한복음 공부 제 80과>

 

대제사장 가야바와 베드로 (하)

 

본문 말씀 18: 19-27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 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니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라. 가로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본문 분해

19절 대제사장의 물음

20절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다

21절 내 말을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22절 하속이 예수를 치다

23절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24절 예수를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냄

25절 베드로의 두번째 부인

26절 네가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았다

27절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대제사장과 그의 하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능멸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아 죽이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능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여호와를 잘 믿고, 율법을 잘 지킨다는 대제사장과 그의 하속들이다.

 대제사장이 “예수께 그의 제자들과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 하였거늘” (중략)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 같이 대답하느냐 하며 손으로 예수를 쳤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참되지 못한 위정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은 항상 하속(현대의 세칭 똘마니)들을 데리고 다닌다. 그래서 이들을 앞세워 반대파들을 말이나 행동으로 협박하고, 또는 주먹으로 겁박하며 죽이고 하여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곤 한다. 당시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요한 9;22)한 것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정치범으로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가 ‘똘마니’의 속어를 사용한 것은 그 시대의 대제사장을 깡패 같은 무리로 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했던 가야바의 말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선동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죽음의 길을 가야 했다. 가야바는 자기의 경쟁자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생각대로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그렇다면 대제사장 가야바의 권모술수(權謀術數)는 성공한 것인가?

아니다. 가야바가 벌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사건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참포도나무와 들포도나무의 죽음이다.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 생명의 피를 들포도나무인 인류에게 주기위해 죽고, 들포도나무인 인류로 대변되는 강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에 매달려 죽음으로써 들포도의 몸은 죽어 없어지고, 참포도나무의 진액인 참생명을 받을 수가 있었다. 이처럼 위대한 일을 농부이신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이러한 은혜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마음에 영접함으로 이루어지는 신앙의 역사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의 근원으로 영접하여 그 생명으로 작은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다.

 

본문공부

 19절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처럼 결박하여 데려간 대제사장이 예수의 동향과 직제자들에 대하여 잘 알면서도 제자들에게 가르친 내용을 묻고 있다.

 

 20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나는 비밀스레 가르치지 않았고, 드러내서 가르쳤다. 그래서 너희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은 내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를 다 들었을 터이다. 내가 말하였던 장소는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이었다. 하늘나라 복음! 곧, 인간들을 새롭게 갱신하는 복된 말을 은밀히 말할 하나의 이유도 없었다는 말씀이다.

 

 21절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은밀히 가르친 말은 한 마디도 없었는데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너희가 잘 알아듣지 못하였으면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들어서 알고 있을 테니’ 같이 들었던 사람들에게 물어보라는 말씀을 하신다.

 

 22절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 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여기서 옛날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 시대의 종교위정자들이 요즘의 깡패 집단과 같다는 것이 여실히 들어난다. 깡패들은 사람을 이렇게 겁박한다. 두목이 위협적으로 질문을 하고, 하속인 똘마니가 주먹질을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본문에서도 똘마니들인 하속이 ‘대제사장에게 이 같이 대답하느냐?’며 큰소리를 치면서 주먹질을 하는데, 바로 이런 행위들이 깡패들의 짓들이다.

 

 23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예수께서는 정말 바른 말씀을 하셨다. 나를 책잡으려면 들었던 자(者)들에게 나의 잘못된 말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물어보지도 않고 나를 치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24절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안나스가 예수를 신문하다가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낸다. 안나스는 AD6년 무렵 수리아 총독을 역임한 그 당시의 원로 정치인이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신문하다가 사위인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고 있다.

 

 25절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니”

붙잡혀가는 스승을 따라간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며’ 저들이 스승에게 어떻게 하는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함께 불을 쬐던 하속들이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며 묻는 말에 깜작 놀란 베드로가 ‘나는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다.

 

 26절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라. 가로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베드로가 ‘나는 아니라.’고 부인을 하니, 동산에서 베드로에게 귀를 베인 말고의 일가인 하속이 베드로에게 다그친다.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분명히 보았는데 아니라고 하느냐?’고.

 

 27절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 기사의 핵심은 사도요한이 베드로에게 스승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라는 요구이다. 스승 예수께서 잡히기 전에 예언하신 대로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의 제자’임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있다. 이렇게 부인한 베드로지만, ‘곧 닭이 울더라’ 닭울음소리를 듣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생명의 근원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이 기사의 의미라고 하겠다.

그런데 더욱 더 좋은 말은 베드로가 스승의 말씀이 떠오르자 곧 바로 통곡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죄책감에 견딜 수 없는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가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보는 눈이 열리게 된다. 아!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던 죄악 된 몸은 강도의 모습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아” 그 생명으로 부활을 믿게 된다(벧전1:2).

만약에 예수를 팔아버린 ‘유다’가 자살(自殺)하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제일 먼저 ‘유다’를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유다는 그러한 기회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지 않았다. 이래서 자살은 살인이다.

한국 무교회의 고 노평구 선생은 자살을 미화한 적이 있다. 그러나 자살의 미화는 그리스도교 진리를 왜곡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살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살인이다.

 

 

요한복음 공부 발표 2016년 5월 10일 (비매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