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공부10>
예루살렘의 성전(聖殿)을 완전(完全)히 치우다
본문 말씀 2장 13∼25절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聖殿)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主)의 전(殿)을 사모(思慕)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者)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회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본문 말씀 분해
13-15절 예수, 예루살렘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르다
16절 “내 아버지 집을 장사의 집으로 만들지 말라”
17절 제자들, 성경 말씀을 떠올리다
18절 네가 무엇을 보이겠느냐
19절 사흘 동안에 성전을 세우리라
20,21절 성전된 예수
22절 부활 후에야 믿더라
23-25절 몸을 의탁지 않으심
개혁자들이 성서를 잘못 읽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주 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사람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할 점은 지구상의 동식물들이 신비할 정도로 정밀하게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인간의 면면을 뜯어보면 참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동식물을 만드신 후에 인간을 만드시면서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영적 세계를 생각할 수 있는 정신을 주셨습니다. 즉,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만물 창조는 완벽하게 이루어졌는데, 인간이 만들거나 내세우는 주장들은 완벽하지가 못하고 허점이 많습니다. 대속의 논리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설명함에 있어 마틴 루터는 ‘대속’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대속’으로 인류가 구원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세상사에서 과학은 말할 것도 없고, 철학도 상식적인 논리의 뒤받침이 있어야 학문이 될 수 있는데-하물며 하늘의 진리요, 인류 구원의 진리가 철학이나 과학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논리에도 답하지 못한다면 진리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늘의 진리! 인류 구원의 진리는 상식적인 논리가 뒤받침 되어야 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뒤받침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접붙임의 만남”이 있어야 예수 그리스도의 “나는 참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하신 말씀이 성립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이 있어야 하늘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였는데, “접붙임의 만남”이 있어야 ‘거듭남’이라는 말이 [생성(生成)!]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먹어야 너희가 생명이 있다”고도 하셨는데, “접붙임”을 받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성서를 크게 잘 못 읽은 곳이 바로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 중에서도 오늘 공부하는 2장 13∼25절까지가 대표적인 곳이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성전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절)” 이 말씀은 너희가 성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치우고 성전을 헐면 “나는 새로운 성전을 세워 인류의 구원의 길을 열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낡은 유물적 성전은 철거하여 완전히 없애고 새로운 성전을 일으키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장래에 대하여 예언하셨습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24:2)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뜨려지리라.”(막13:2)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눅21:6)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장차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뜨려질 것이라 하였고, 실제로도 무너뜨려졌습니다. 완전히 철거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이 부분을 완전 철거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서를 잘 못 읽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성전 완전히 철거를 사복음서에 기록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를 비롯한 많은 성서 연구자들이 이 성전의 완전 철거를 성전의 ‘정화’나 ‘개혁’ 정도로 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바로세우기보다는 용도 폐기-즉, 완전 철거로 보아야 새로운 성전이 건립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을 폐기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흘린 피를 인류가, 우리가, 내가, 믿음으로 받으므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살아 그 생명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성전인 것입니다.(고전 3:16)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희생양으로서의 죽음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처럼 속죄의 제물로서의 희생이 아니라 십자가상에서 강도인 들포도나무가 죽어 없는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접목시키는 희생입니다. 예수 자신의 몸-즉, 참포도나무 가지를 갈기갈기 찢어 인류에게 접목시키는 희생입니다.
예수께서는 3장 1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에서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보다 앞서 2장 14∼19절까지의 말씀에서 성전을 완전히 헐어버리시고, 3장 3절부터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인류 구원의 주추>를 놓는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새로운 그리스도교의 주추가 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비로소 인류 구원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깊이 생각해봅시다. 아담의 아들 아벨의 제사방법!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후 광야에서의 40년 동안의 제사방법! 그 후 사사의 시대와 선지자의 시대 또는 왕정 시대를 거처 포수(捕囚) 시대까지의 제사방법! 이런 제사방법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까지의 제사방법입니다. 그러나 이런 제사방법으로는 결코 ‘인류 구원’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하늘의 새 생명처럼 새롭게 하시려고 오셨는데 구약에서의 소와 양, 비둘기를 잡아 제사하는 “희생양의 의미”를 이어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대속으로 본 것이 성서를 잘 못 읽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을 떠나 세상적인 예를 들어봅시다. 건축가가 집을 지으려고 하는데 기존의 건축공법보다 여러 면에서 좋아진 공법이 나왔다면 기존의 공법을 다시 사용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적인 일들도 한번 실패하면 다시는 그 공법을 사용하지 않게 되는데 하물며, 속죄의 제사 방법으로는 인류 구원이 안 되는 줄을 아시는 하나님이 구약시대와 같은 방법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본 것이 잘 못이었던 것입니다.
양이나 송아지, 비둘기를 희생시키는 구약에서의 제사로는 인류를 구원 할 수 없어 예수께서 오셨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벨의 시대로부터 예수께서 오시기 직전까지 행해오던 희생이라는 제사의 의미를 그대로 이어받는다는 것은 세상적인 예로도 아닌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신(新) 인류(人類) 구원(救援)의 진리(眞理)를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이 “거듭남”은 당시로는 전혀 새로운 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니고데모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는 이스라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요3:10) 하고 묻고 있습니다. 그 시대 내노라고 하는 학자인 니고데모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시대 엘리트 학자가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은 그 말을 처음으로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 새로운 말은 신(新) 진리(眞理)가 세상에 전파(傳播)되기 시작(始作)했다는 의미(意味)가 있습니다.
시각(視覺)의 차이(差異)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마틴 루터는 “대속”으로 보았고, 저는 “접붙임의 만남”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대속”은 천년을 연구하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이란 말이 생성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의 “접붙임의 만남”은 들포도나무인 인류-즉, 여러분과 내가 강도의 모습으로 예수와 함께 죽고, 그 죽은 몸에 예수 그리스도가 흘린 피를 접붙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접붙임은 ‘거듭남’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생성(生成)되어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요한복음 저자에 치밀한 편집을 다시 한번 봅니다.
1장 29-42절 : 두 번의 직접 증거로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 또는 어린양”이라고 하였습니다.
1장 43-51절 : 직접 증거의 답으로 나다나엘이 증거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2장 1-11절 : 혼인 잔치 집에서 마리아는 아들 예수에게 간절히 청합니다.
“세례자 요한과 나다나엘의 증거에 대한 대답을 보여야 한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는 첫 표적으로 포도주를 만드십니다.
2장 12절 :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후 가버나움에서 때를 기다리십니다.
2장 13-22절: 예수, 독생자로서의 첫 행보로 성전을 쓸어내십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성전을 세우기 전에 장삿집으로 변한 성전 을 먼저 쓸어내신 후 장사꾼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세우리라.”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가, 유대교의 끝입니다.
내가 사흘 동안에 세우리라가, 그리스도교 시작입니다.
3장 1-15절 : 새 성전의 주추가 되는 말씀 “거듭남”을 이야기하십니다.
본문 공부
13절“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예수께서 어머니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혼인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마시게 함으로써 하나님께로서 오신 분이란 것을 증거로 보이신 후, 가버나움에서 며칠을 묵었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14,15절 “성전(聖殿) 안에서 소와 양,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예루살렘에서 제일 먼저 하실 일은 성전의 확청(廓淸)이었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완전 철거에 앞서 장사꾼 세상이 되어버린 기존의 성전을 바로잡는 일이었습니다.
성전은 신성한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 성전 마당에 형식적인 번제로 쓰일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환전상들이 주욱 늘어앉아 있고, 그것들을 사려는 사람들로 득실대고 있었으니 시끌벅적한 장바닥과 다를 바 없는 풍경입니다.
이를 본 하나님의 아들이 주인으로서 깨끗하게 바로잡는 것은 당연합니다.
16절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 안에서 양과 소를 다 쫓으신 후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호통을 치십니다.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거라!” 그리고 “신성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왜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을 깨뜨리기 전에 먼저 확청(廓淸)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이사야가 잘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1장 11절 이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祭物)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羊)의 번제(燔祭)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숫송아지와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焚香)은 나의 가증(可憎)히 여기는 바요, 월삭(月朔)과 안식일(安息日)과 대회(大會)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聖會)로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이렇게 성회(聖會)를 빙자하여 악을 행하는 것을 하나님이 못 봐 주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속하게 하려고 속죄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그 제사로 더불어 더욱 악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장사꾼들은 제사보다 양이나 송아지를 팔아 이익을 내는 데에만 더욱 분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바로잡기 위하여 예수께서 독생자로 오신 것입니다.
특히 이사야가 지적한대로 성전을 그저 왔다 갔다 하면서 성전 마당만 밟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외식(外飾)을 이제는 하나님이 보시기 힘들어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하소연하시는 것입니다.
17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主)의 전(殿)을 사모(思慕)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위의 말씀은 시편 69편 9절에 있는 말씀인데, 이사야가 본 것처럼 헛되이 성전만 왔다 갔다 하는 곳에는 하나님은 없이 그들만의 대회로 하나님이 떠난 곳을 삼키리라는 말씀을 제자들이 떠올린 것입니다.
18절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채찍을 휘두르며 쓸어내는 예수께 유대인들이 묻습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고. 다시 말하면 양과 송아지, 비둘기는 번제로 드릴 제물로, 우리는 오래 전부터 성전 안에서 팔아 왔는데, 네가 무슨 권한으로 막느냐? 그런 권세가 있으면 표적을 보이라 한 것입니다. 권능을 보이면 인정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1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예수께서는 물음에 대한 답을 하십니다. ‘나는 새로운 성전을 건설하려고 왔다. 그러니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그러면 사흘 동안에 일으켜 세우겠다.’ 아 말은 미구에 닥칠 십자가상에서 흘릴 피로 사흘 동안에 성전을 건설 할 것이라는 암시인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증언자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居)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라고 묻습니다. 바울은 우리 믿는 사람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성전을 새롭게 세우기 위해서는 낡은 성전을 완전히 헐어버려야 합니다. 낡은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었지만, 새로운 성전은 우리들 각자 안에 있습니다. 이 성전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옛것은 완전히 헐어내야 할 것입니다.
20,21절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유대인들은 코웃음을 치며 묻습니다. “이 성전은 46년이나 걸려서 지었는데 어떻게 네가 사흘 동안에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냐?” 그러나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의 성전만을 생각하며 물었고, 예수께서는 장차 사흘만에 세울 보이지 않는 성전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22절 “죽은 자(者)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19절에서 예수가 “삼일 동안에 성전을 일으키겠다”고 하셨던 이 말씀은 예수 자신이 성전임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제자들이 이 말을 깨달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신 후 사흘만에 살아나신 뒤였다는 것입니다.
23절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성전을 쓸어내신 후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더 계시면서 많은 표적을 행하시고, 이제까지 예수를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그 표적을 보고 믿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24,25절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알게 된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예수께서는 사람을 의탁하지 않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보통사람들이 할 수 없는 기사(奇事)와 이적(異蹟)만을 좇을 뿐, 진실된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직 주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을 우러렀다는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