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회 장로님과 나의 결혼
1973년 첫 개업을 하면서 그 때에 시골에 계셨던 어머니와 동생들이 서울에 와 살게 되었다. 시골에서 별로 할일도 없고, 내가 개업을 함으로써 일손도 부족하여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머니와 동생들이 성동구 사근 동에 있던 홍익 교회에 나아갔다. 1975년 2월 회심을 체험하고 나의 삶은 늘 힘이 넘치고 늘 적극적이었다. 하여 1976-7년 2년간 홍익 교회 청년회 총무를 하였는데, 그 때에 교회에서는 매년 청년회 회지를 발간하여 교회 소식지로 그 일익을 담당하였었다. 그러나 1-2호부는 등사기로 밀어 발간을 하였고, 3-4호부는 타자로 찍어 발간을 하였는데, 내가 처음으로 5호를 인쇄를 하여. 발간과 동시에 회지 이름도 창조(創造)란 이름으로 바꾸어 A용지 140면으로 대 회보를 발간하였었다.
그 때까지 김동회 장로님은 사오년 청년회 회지 발간에 금전적 지원을 해왔는데 그 금전의 가치에 비해 회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일이 계속 되었던 것이었다. 내가 총무를 하면서 정말 획기적으로 회지를 발간하므로 김동회 장로님은 나를 주목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동회 장로님은 자수성가 하신 분으로 (대한 농구협회) 일생 이사직을 수행한 농구를 참으로 좋아하신 분이다. 농구 시합이 있을 때마다 제일 앞자리에 앉아 대한 농구 협회에서 명예 이사직을 줄 정도로 농구를 좋아하고 농구 협회에도 금전적 지원을 많이 하신 분으로 생각이 되어진다.
청년회 회지에 교인들의 글을 기사화해서 많은 교인들이 좋아한 회지로 발간해 나누어 주니 모든 교회 신도들이 좋아 하였다. 특히 자신들의 글이 책으로 나오니 더욱 좋아 했다. 그리하여 김동회 장로님은 예배 후 임 총무의 수고의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리고 나의 중매를 자신이 하겠다고 미리 예고의 이야기를 하셨다. 그 때에 마침 나의 처되는 사람이 김동회 장로님의 사위되는 사람의 조카딸이라, 다시 이야기하여 나의 처 작은 아버지가 김동회 장로의 사위이므로 사위집에 가면 사위의 조카가 와 있어 장로님이 잘 알게 되었었다. 나의 처 작은 아버지는 그 때에 육군 중령으로 군목으로 근무를 하여 조카의 도움이 늘 필요하였던 것이다. 김동회 장로님은 나의 처 될 사람에게도 자신이 중매를 하겠다고 미리 예고의 말씀을 하였다고 결혼 후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1978년 결혼을 하였다. 결혼 후 지금까지 나의 처는 정말 헌신적으로 가정을 위해 일하고 있다. 나의 모든 일들을 해준다고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특히 밥을 챙겨 주는 일은 언제나 처가 한 것이다. 새벽이고, 낮에도 꼭 자신이 챙겨준 음식을 먹는다. 나는 오늘도 생각 한다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참으로 나 같이 복 받은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 분께 감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