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書硏究 雜紙를 만남!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상에서 강도의 모습으로 죽고,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부활의 체험을 한 후에 나에게는 큰 변화가 왔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가치의 변화가 온 것이다.
길가에 이름 없는 풀 한 포기가, 전에는 무가치한 존재였는데 이제는 그 풀한 포기가 창조의 생명력이 이글거리며 생동하는 존재란 것을 알게 되었고, 전에 아름답게 보였던 명동의 네온사인들이 소돔의 거리로 보였다. 그리고 그사이 여자관계가 복잡하였는데 그것들이 부부관이라는 가치관으로 분명히 알게 되었다. 또는 자녀 교육관, 자연관 등이 정립되었다.
이러한 때에 1975년 5월 어느 날 국희종 선생님이 서울에 오시어 나의 집에 심방을 오셨다. 오셔서 (성서연구)잡지 그해 것 1,2,3월분을 주시고 가셨다. 나는 그 성서연구紙를 만남으로서 고기가 맑은 물을 만난 듯이, 정말 감격하며 읽었다. 이제까지 읽은 책은 자갈이라면 이 성서 연구지의 기사는 다 진주였다. 나는 이 잡지를 주필이신 노평구 선생님께 구독하고 서울 YMCA 대 강당에서 있었던 성서 강연회에 청강인으로 출석을 하였다. 잡지 독자와 청강인이 된 것이다.
이 성서연구 잡지를 통해 나의 독서력은 한없이 넓어갔다. 성서 잡지에 인용되는 책을 구입하여 미친 듯이 읽었다. 그리하여 나의 일상의 삶이 바뀌었다. 전에는 돈을 벌고 일을 하는데 전력했다면, 이제는 내 시간을 갖고 책을 보고 모임 강연회에 참석하고 하는 것들이 더욱 중요하게 생각이 되었다. 그리하여 내가 내 시간을 자유로 쓰는 직업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혼 후 자유업 장사를 하게 된 것이다.
또한 서울 YMCA 성서 강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다 엘리트 중에 엘리트였다. 그 때에 그 성서강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보면, 충남대 총장으로 계셨던 정태시 선생, 고려대 교수 고병려, 서울대 유달영 유희세 교수, 현재 한양대 총장으로 계신 최선근, 교육기관에 몸담고 있었던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사람은 장문강 교수, 박상익 교수, 임세영 교수, 박완 교수, 진익열 교수 등은 그 때에 학생이었다. 이었고 초, 중, 고등학교 교사가 대부분 이였다. 장사를 하는 사람은 나 혼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후에도 한국에 기라성 같은 정신적 선생님들을 수없이 만나고 하였다. 서울대 유달영 교수, 부산에 장기려 박사, 대구에 박노훈 선생, 광주에 박석현 선생 등 많은 분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성서연구지를 만남으로서 그 많은 기라성 같은 한국의 정신적인 지도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대 선생님으로는 함 석헌 선생, 송두용 선생, 박석헌 선생이 계셨다. 성서연구 주필 선생인 노 평구 선생은 필자를 지극히 사랑하셨다. 나는 하계, 동계 전국 집회가 있을 때에는 사진을 찍어 보내주는 일들을 하였다. 그리하여 더욱 많은 사람을 알게 되어 전국적으로 무교회 집회식구들은 다 알정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