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서울의 봄은 따뜻했다.
서울의 봄은 따뜻했다. 그리고 유년시절부터 사춘기의 나의 가난한 생활도 서울의 따뜻한 봄과 함께 가난을 녹여 자립의 기회가 온 것이다. 69년 봄은 내가 시골에서 서울로 온 봄이다. 세월의 봄도 왔지만, 내 인생의 봄도 온 것이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날개 치는 봄이다. 내 인생의 삶이 시골에서, 서울의 생활로 ‘백팔십도’의 대 변화가 온 것이다.
1969년 4월 서울에 상경해서 먼저 와 있는 형과 같이 있으면서 형이 나가는 직장에 나가게 되었다. 1960년대 초에 우리나라는 한, 일 회담을 통해 국교가 열리므로 일본에서 경공업인 ‘요-꼬. 란 편물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우리나라 산업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지금은 요-꼬가 경공업으로 인기가 없는 직종이지만, 그 때에는 우리나라 산업에 중공업, 첨단공업이 없을 때였다. 경공업이지만, 신산업으로 최고의 인기 직종이었다. 그 때에 대우, 삼성이 다 요-꼬 산업으로 산업기반을 잡은 것이었다.
나는 그 때에 요-꼬. 라는 편물직종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첫 달 수입이 약 9천원이었다. 이 때에 9천원은 쌀로 세 가마 값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에는 약 3만원의 월급이었으니 상상을 초월한 월수입이었다. 금월리에서 1년 품삯이 쌀 세 가마였으니 참으로 많은 금액이었다. 그리고 한달 하숙비가 3천원으로 월급의 3배정도 되었다. 이렇게 높은 월급을 받으면서 일해 가난에서 벗어나는 꿈에 벅차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회사가 8월 달에 부도로 문을 닫게 되어 나는 기술이 부족하여 형에게 의지하여 일을 했는데 형과 일을 따로 하게 되었다. 또한 그 무렵 형은 폐결핵이 앓아서 치료차 시골에 가게 되어 서울에 나 혼자 남게 되었다. 그런데 부도가 8월에 난 다음달이 9월 추석이 있는 달이라 재취업도 못하고 한달을 놀고 있었다. 추석명일이 지나고 나는 새로 직장을 찾아야 했었다.
하나님이 나에게 지혜를 주심
새로운 직장이 바로 ‘천일 무역 주식회사’다 이 회사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회사 직원이 약 500여명 지금은 500여명이면 중소기업이지만 그 때에는 대기업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때에 하나님이 나에게 지혜를 주셨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 내가 (견본을 낸 물건을 다!) 외국 무역 바이어가 계약을 해주어 모든 견본은 내가 담당하게 되었고, 계속적으로 계약이 되어 일감이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그 때에 한번 계약이 약 2-3만장의 계약을 대량 계약으로 이야기가 되고, 수천 장의 계약을 소량으로 이야기였다. 그런데 내가 견본 낸 티셔츠는 약 20만장 30만장이 보통으로 대량 계약이 계속되었다.
1970년대 초에 1차 세계 석유 파동으로 편물, 직물회사가 일감이 없어 문을 닫을 무렵 나의 회사는 일감이 넘쳐 나고 있었다. 그 일감이 다 내가 견본을 낸 것들이다. 그 때에 500여명의 회사에 공장장 월급이 약 2만5천원 나의 월급이 약 3만원 공장장님 보다 더 월급이 많았다. 그 때에 동사무소에 9급 공무원 월급이 약 7천원이었으니 나의 월급이 참으로 많은 월급이었다. 사장님의 생일날에는 전무님이나, 공장장님이 초대되었는데 나도 그 때에 초대되었다. 또한 명절에는 회사에서 보너스가 없었고, 퇴직금도 없을 때였지만, 약 20여명에게 떡값이란 명목으로 보너스를 주었는데 내 이름이 제일 앞에 있었다. 나는 유년시절 가난했기 때문에 약 85%는 저금을 하였다. 생활비 15%도 참으로 많은 금액이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심으로 회사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은 늘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는 신앙심이 있었기 때문으로 늘 생각한다. 거짓 없이 최선을 다했기 때문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 역시 여자 친구도 많아지고 하여 21살의 나이에 사랑에 빠지기도 하여 훗날에 나에게 큰 시련으로 다가오기도 한 일들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