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心! 길은 여기에
성서에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애통은 무슨 애통입니까? 그것은 부모의 죽음에 대한 애통은 아니요. 자식의 실족에 대한 애통도 아니다 ‘복 있는 애통’은 자신의 죄를 생각하며 괴로워하고, 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죄 때문에 골육이 녹아내리는 아픔을 나의 책 (195)쪽에 아래와 같이 적고 있습니다.
‘내가 술을 마시고 세상을 거꾸로 사는 동안 세월은 가을도 지나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날도 나는 나의 죄를 잊기 위해 술을 마셨다. 그러나 그 죄는 더 바싹 내 몸을 죄고, 내 몸을 사로잡았다. 나는 밤을 술과 창기와 보내고 집에 와서는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나는 어머니와 동생들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억지 원망을 해댔다.
로마서 7장 24절의 말씀처럼 오호라, 나를 죽음의 사자에게서 누가 건져 주려나? 나는 밤마다 창기와 더불어 술을 마시면서, 죽음이 내 영혼을 지옥의 밑창으로 밀고 내려가려고 내게 다가오고 있구나! 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 중에서도 죄인이라 내가 지금 죽으면 지옥에도 못 갈 것입니다. 하며 절망에 빠졌다. 지옥에도 못 가거나 아니면 지옥의 제일 밑창에 갈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기가 막혔다. 실로 나를 반겨줄 사람은 이 세상에도 저 세상에도 없다. 자, 죽자, 죽어 죽음이 시시가각으로 다가오는 구나 이렇게 생활하기를 4,5개월. 나는 한밤중에 한강에서 자살하려고 강가를 걸으며 울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릴 때에 배운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노래하며 유년시절을 회상하기도 하였고, 도저히 다시 살 수 없는 죄인을 국희종 선생님은 받아 주실까? 아니, 염치없고 뻔뻔한 생각이지. 자문자답하며 자탄하고 있었다. 나는 나의 죄 짐이 이렇게 무거운 것을 깨닫고 죽으려 했지만 결국 마음뿐이요 죽지도 못하는 바보였다.
길은 여기에
악마의 사자 죽음이 막 나를 지옥의 밑창으로 끌어내리는 때에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국 선생님을 통하여 뻗쳐졌다. (아래 편지가 국 선생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주님 성은 중 그 동안도 잘 지냈는지? 이곳도 주님 은혜 중에 평온하고 복흥의 교우님들은 다 평안하신 듯하니 감사뿐이네. 지난번에 자네의 형 봉기에게서 크리스마스카드가 왔었는데 아마 별연고가 없는 모양이네. 그간 어머님과 동생들 다 무고하신지? 험난한 세상에 주의 믿음과 말씀으로 늘 승리의 생활 있기 비네.
그런데 오는 2월 17일 저녁부터 우수영 교회에 계시는 장 전도사님을 모시고 모임을 갖기로 하였네. 구정 초이고 또 1년에 한 번인 모임이니 먼 길에 힘이 들더라도 참석해 주었으면 좋겠네. 주님허락 주시는 대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기도도 부탁하는 바이네.
그럼 어머님, 가족들에게도 문안드리게, 주은 중 늘 건강을 기원하면서 붓을 놓네. 1975년 1월 29일
이런 편지를 받고도 나는 국희종 선생님 앞에 나갈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선생님 기대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정말 자신의 죄를 들여다보고 절망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나의 죄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절망하고 있었다.
나는 이 때 ‘조지 허버트의’ 시와도 같이 사랑에 넘치는 속삭임을 받았지만 항상 나 자신만 돌아보고 뒷걸음치고 있었다.
사랑! ‘조지 허버트’의 詩
사랑은 어서 돌아오라고 하였으나
추악하고 더러운
나의 영혼은 뒷걸음쳤다
눈치 빠른 사랑은
주저하는 나에게
바싹 다가와 다정하게 물었다.
무엇이 부족하냐고
십자가의 속죄가 있지 않으냐고
항상 뒷걸음질만 치는 나에게 조지 허버트의 사랑처럼 국희종 선생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또 한번 나를 끈으로 매어 끌어당겼다.
“이제 구정도 내일로 다가온 즈음 그 동안이라도 주은 중 평안하며 어머님 동생들 다 잘 계신지! 이곳 나와 나의 곳, 그리고 복흥 교우님들도 은혜 중 평온하니 감사할 뿐이다. 지난번 서신연락을 했었는데, 오는 2월 17일 저녁부터 복흥에서 연례적으로 갖는 모임을 갖기로 되어 있다. 되도록 꼭 참석하기 바란다. 아무리 세상사는 문제가 어렵고 복잡하고 해도 그럴수록 더욱 주님께 매달려 힘을 얻고 난관을 극복하고 충성스럽게 주님 뜻을 따라야 될 것으로 믿는다. 어머니께도 문안 드려주기 바란다. 모임에 오게 되면 그 동안 기식문제는 염려 말고 여비나 세수도구 정도 마련하고 오면 될 것이다. 서울 계신 몇 분들도 착석하실 것으로 생각되어서 기쁨으로 서로 대면을 기대하면서 하나님께 간구 중이다. 주은 중 평안을 기고하며 문안한다. 1975년 2월 1일”
한 모임에 참석하라고 두 번씩이나 편지를 받기는 이것이 처음이요 마지막이었다. 그 때에 선생님께서 두 번째 편지로 나를 독려하지 않았다면 나는 감히 선생님 앞에 나설 용기는 내지 못했을 것이고, 참석하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히 이 세상에 살아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두 번째 편지를 받고, ‘가자 나의 고향으로, 나의 선생님께로, 내가 살길은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 모든 일들을 다 버리고 참석하게 되었다.
그 때에 (장치만) 전도사님의 로마서 강의의 내용은 내 영혼을 영원히 살리고, 내 안의 사탄을 모두 몰아내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주관하시는 주가 되셨다.
나의 이제까지의 죄악 된 삶과 가치관은 십자가의 두 강도 중 한 사람으로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 내 영혼이 다시 사는 부활의 신앙을 체험하게 하셨다.
존 번연이 말하는 나의 ‘죄의 짐’ 그 죽음의 짐이 내게서 떠나가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은총으로 은혜로 내가 다시 살았구나 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2장20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서 1장 12절)
이런 말씀들이 내 가슴속에서 살아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죽은 것 같은 나무에 물이 오르듯이 죽은 것 같았던 내 영혼이 주님의 말씀을 만나 춤을 추었다.
‘詩’ 필자 작시
오! 주여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당신의 은혜가 크나이다.
당신께 영원히 영광과 찬송을 돌리나이다.
당신은 나의 구세주가 되셨나이다.
당신은 나의 피난처가 되셨나이다.
당신은 나의 길이 되셨나이다.
죽음에서 삶으로의 길이 십자가를 통해 열렸나이다.
당신은 영원한 진리이시나이다.
십자가의 복음은 내 영혼이 다시 사는 진리십니다.
당신은 나의 새 생명이시나이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 생명이 아니라
당신의 생명으로 살게 되었나이다.
이제 내 생명이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오! 주여!
당신은 영원한 나의님이시나이다.
호세아가 창기 고멜과 결혼한 것같이
당신은 창기 같은 나를 맞아 주셨나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은혜 중 최대의 은혜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
그리고 실패를 맛보아야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이나니
그 실패를 통하여 눈이 열리고 진리를 볼 수 있고
진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되나이다.
이제까지 보지 못한 진리의 말씀을 볼 수 있고
이제까지 아름답게 보이던 것이 모두 추하게 보이고
이제까지 무가치하게 보이던 풀잎 하나도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가득 차
창조의 솜씨가 오묘하게
번뜩이고 있음을 보았나이다.
모임이 끝나고 선생님과 정읍 내장산어귀까지 걸었는데, 온 천지가 눈으로 쌓여 나의 죄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토록 하얀 눈과 같이 깨끗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격과 감사의 찬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선생님, 참 아름답습니다.’ 했더니 ‘이 모든 것이 주님이 우리의 죄, 먹과 같은 죄를 이 눈과 같이 희게 하시는 것이라네.’라고 선생님은 대답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