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아침을 열며 (145)
대중문화 개방이란 무엇인가?
대원군 쇄국정책 결과로, 일제 36년 식민 지배와 동족 살육 전쟁을 불러왔다.
겨울연가와 대장금은 우리나라 대중문화를 세계에 알리는데 바람 역할을 하였다.
그 기운(氣運) 바람이 세계를 휘몰아쳐 대한민국을 각인(刻印)하였다.
김대중 정부는 1998년 대중문화를 개방하여 이러한 큰일을 하였다.
대원군 시대에도 서양 문물을 받았다면, 위와 같이 큰 변혁(變革)이 우리나라 한반도에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나의 “임중기의 세상사는 이야기. ‘작은 목소리’란 책”에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대원군이 외국의 통상 요구를 거부한 까닭은 천주교를 못 믿게 하기 위한 것이었고, 나중에는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을 수천 명씩이나 살육하게 된다. 동족끼리의 살육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종교(宗敎)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들을 끌어내어 한강 변 언덕 위에서 작두에다 사람의 목을 놓고 썩둑 썩둑 목을 베어 죽였던 것이었다” (작은 목소리. 269쪽 원저 사학자 이기백)
작두에 잘린 머리가 언덕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 한강 물속에 빠졌다는 것은 우리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이 언덕 이름이 오늘도 ‘절두산 성지’로 불러어지고 있다.
이 절두산에서 천주교인 살육으로, 우리나라는 스스로 개화(開化)와 개혁을 못하여. 일제 36년을 불러왔고, 동족 살육의 전쟁 6, 25의 상징으로 38선은 오늘날까지 그어져 있다.
만약!! 흥선 대원군 시절에 서양 문물(文物)을 받았다면, 일본의 36년 식민지 세월은 없었을 것이다. 동족 살육 전쟁도 없었을 일이다. 미군(美軍)은 우리나라 주둔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리하여 한반도가 세계의 심장 같은 나라로, 우 뚝 서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 시절에 서양 문물을 받지 못하므로, 개화를 못하여, 일본을 불려왔고, 미국군을 불려왔고, 38선이 그어졌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대원군 시대에 일본도 우리나라와 같이 미개국(未開國)이었다. 다시 말하여. 우리나라보다 더욱더 미개국이었다. 이때까지는 우리의 문화가 일본문화를 선도하였다. 그러나 서양 문화와 비교할 수 없는 우물안에 개구리 같은 문화였다.
우리는 서양 문물을 받지 못했는데, 일본은 받아 개화(開化)하여. 우리나라를 미개국으로 보고 강화도 조약에 나선다. 그것은 ‘강화도 조약’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고종 12년 1875년 일본 특명전권대사로 온 ‘구로다’는 일본 개화 제2세대로 서양 문물을 잘 알고, 서양 학문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강화도 조약 전권대사는 해외를 한 번도 가본 일이 없는, 오경석, 석의정, 박규수 등이 참석하여 ‘치의 법권’(致意 法權)이라는 의미를 알지 못하고 강화도 조약에 서명한다. (치의 법권이란 ‘외교관 면책특권’인데 일본인 전체가 면책특권자가 된다는 말이다.) 어느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을 욕한다. 왜 우리나라를 침탈하였다고. 그러나 나는 우리가 개화의 시기를 놓치고, 일본은 개화의 시기를 잘 잡아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고 보인다.
나는 ‘아 뼈아픈 34년의 세월이여 한(恨)이 쌓일 뿐이다.’
순조 32년 1832년 영국 상선 1척이 충청도 해안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고, 계속 통상 요구가 이어져 고종 3년 1866년 미국 상선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 이르러 통상 요구하는 세월이 34년이다. 이후에 우리나라 통상을 포기하고, 배를 일본으로 돌려 일본에 통상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일본은 통상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우리는 34년의 세월을 천주교인을 탄압하고, 목을 작두로 자르는데 몰두하였다. 이보다 더 미개인 나라가 세계 어디에 있을까?
34년의 세월을 우리나라가 문을 열어 개화와 개혁을 하였으면, 일본은 개화의 시기가 늦어져 미개인으로 남았을 것이다. 우리! 우리나라 어두운 시절을 바로 보아야 한다. 일본이 우리를 식민지로 지배한 것은 자업자득으로 온 것이다. 개화의 시기를 놓친 것이 한(恨)이 쌓일 뿐이다.
대중문화란 이러한 것이다.
이리하여 대중문화는 인류(人類)와 한나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만들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