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아침을 열며 (40)
나의 책을 복사하여 학생들에게 판매하다.
“임중기의 세상사는 이야기” 작은 목소리가 (2000년 6월) 책으로 발간되니 어느 신학대학교 헬라어 교수가 나에게 학생들에게 원가로 판매할 것이니, 1백권을 달라고 하였다. 저자로서 정말 반가운 일이였다. 그것도 신학대학교 학생들에게 읽게 하겠다는 것에 고무되었다. 다음해에도 100권 그 다음해에도 100권 약 3년에 300여권을 가져갔다. 인쇄비 정도로 원가였다. 그래도 나는 좋았다. 그런데 훗날 어느 대학교수의 학생들에게 책을 판매하는 것을 비판하는 기사를 보았다. 그리하여 나는 그 기사를 읽은 후부터는 책이 품절되었다고 주지 않았다.
그런데 약 4-5년의 세월이 흐른 후, 여름성서 모임에서 그 헬라어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헬라어 교수 ‘왈’ 임중기 선생께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하시면서 그동안 책을 주시지 않아, 복사하여 1년에 100여권씩 팔았다는 이야기였다. 4-5년 복사하였다는 이야기였다. 그 헬라어 교수 ‘왈’ 임 선생의 책이 아이들에게 읽히기가 제일 좋다는 것이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여 책을 내는 정신!, 생활 신앙을 본받아야 할 일이라며. 젊은이들에게 귀감의 책이라고 소개하기가 좋다는 말이었다.
(2007년 어느 가을밤에 헬라어 교수가 나의 집에 오셨다. 교수 ‘왈’ 자신이 ‘헬라어 낱말 분해사전’을 출판하여야 하는데, 출판 비를 부탁하고 싶어 왔다는 이야기였다. 또한 박()() 선생께 이야기를 전해 주어 같이 출판 비를 만들어 주면하였다. 약1200백만원이라는 돈을 박()()선생과 나 보고, 해 주라는 의미의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박()() 선생께 그러한 이야기를 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찬조의 의미로 1백만원을 드리겠다고 하였다. 아마 헬라어 교수는 고 국희종 선생의 책을 ‘천우회’에서 발간하였으므로, 자신의 책도 발간해 주면 좋겠다는 이야기인가도 알 수 없었다. 이때만 하여도 헬라어 교수와 천우회모임의 사람들은 한집 식구로 생각 할 때이다.)
그런데 세월은 흘려 2009년 3월 “우리가 먹어야 할 생명의 떡” 이라는 책이 발간되어, 박()()선생과 한국 무교회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그 때에 지난 8년간 나의 책 ‘임중기의 세상사는 이야기’ 작은 목소리가 좋은 책이라고, 신학대학생들에게 판매하였던 헬라어 교수가 나를 비판에 대열에 서서 이단자라고 성서신애지에 8개월에 거쳐 8회 기고하며 비판하였다. 그것도 극단적으로 사탄이라는 말을 계속하였다. 참으로 이율배반적이라고 할 일이다. 헬라어 교수가 전에 책 출판 비, 부탁을 들어주지 않아 비판의 대열에 섰을까? 설마 그를까 하는 마음이다.
나는 마음으로 정말 불쾌감이 높아지면서도, 한편으로 전화위복을 느끼며 긍정적으로 생각하였다. 왜 그는 신학대학교 헬라어 교수다. 나를 비판하면 나에 대하여 관심이 높아질 것을 생각하니 긍정적으로 생각이 되었다.
그 때에 나에게 많은 전화가 왔다. 아니! 무슨 잘 못이 있기에 저토록 비판하느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박()() 선생께서는 헬라어 교수에게 성서원본의 말씀을 풀어 나의 책 “우리가 먹어야 할 생명의 떡”을 진리(眞理)로 반박을 하라는, 부탁을 하였는데, 헬라어를 풀어 ‘진리’로 반박이 아니라, 너무나 과격하게 사탄이라는 욕을 하여 박()() 선생으로부터 두 번이나 원고반환이 되어 써진 원고가 그 정도라고 이야기를 하였다.
(교수에게 헬라어로 임중기의 “접붙임의 만남”이라는 십자가상의 해설(解說)이 맞느냐? 묻고, 또한 반박하라는 뜻이었는데, 헬라어 주해(註解)은 하지 않고, 욕만 써 놓았다는 박()() 선생의 말이었다.) 욕만 써 놓고 8회분에 3백만원을 요구하여, 주었다는 박()() 선생의 말이다. 일을 시켜 돈을 줄 수 받게 없었다고 한다.
헬라어 사전이 2010년 5월 30일 발간되었는데 3백만원은 “헬라어 사전 출판기념회 때”에 보냈다는, 박()() 선생의 말이다. 박()() 자신이 출판기념회에 참석을 하면, 자신을 또 이용하여 인사 소개도 할 것 같아 돈만 보냈다는 말씀이었다.
그런데 ‘성서신애 잡지’에서는 이러한 글을 기사화 해 준 것은 무분별한 일이었다고 생각 한다. 이 후에 헬라어 교수는 광주에 어느 모임에도 천우회 모임에도 나오지 않으신다. 천우모임에서 교수를 거부가 아니라, 자신 스스로 나오지 않으신다.
그러는 사이에 김()곤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분은 중고등학교 선생을 일생하시고, 정년하신 분이다. 또한 일본의 “內村鑑三 全集을 우리나라 언어로 번역하신 분이신데. 나의 책 ‘우리가 먹어야 할 생명의 떡’을 단숨에 읽었다고 이야기하시며. 임중기씨가 이야기한 ‘접붙임의 만남’란 말씀을 5-60년 전에 일본에 동경대 총장을 하였던, “矢內原先生께서 서울 YMCA기독교청년회관에서 말씀하셨는데, 그 때에도 접목(接木)신앙에 반대의 목소리가 일어났다고 하신다. (이후, 일본에서도 접목의 신앙을 반대하여 활성화 되지못한 것으로 않다,)
그런데 김()곤 선생께서는 矢內原先生께 다가가 말씀에 대하여 공감의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무명의 청년신분이라 ‘矢內原先生께 접근하지 못하여 인사를 못하여. 일생 그것이 안타까운 일이었다고 하시며, 오늘은 생각이 날 때에 임중기씨에게 전화를 하여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어 전화를 한다는 이야기이었다.” 공감한다며 감사의 인사였다.
그리고 2-3년 후에 矢內原先生께서 서울 YMCA기독교청년회관에서 말씀을 하셨던 글이 책으로 발간되었는데, 일본의 渼子(나미코) 선생이 그 책을 나에게 보내 주시여. 원본으로 읽을 수 있었다. 또한 김()곤 선생은 책이 왔다는 이야기를 나에게 들르시고, 복사하여 보내주시라고 하여. 내가 복사하여 보내 드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