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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개업

임중기 2007. 6. 3. 09:56
 


첫 개업


1973년 초가을 어느 날 회사 동료로부터 만남을 제의 받고 밤에 나가니 노동조합 결성 발기모임이었다. 충분한 내용을 접하지 못하고 참여하게 된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발기모임에 참석하게 되어버렸다.


그 사이 나는 견본을 내는 일을 했기 때문에 회사에서 가격을 정할 때는 견본 낸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것이 보통이었다. 견본 낸 사람이, 그 옷에 대하여 잘 알기 때문에 하루에 일반 기능공이 일하여 수량을 얼마나 짜겠느냐는 의견이었다. 나는 가격을 정하는데 너무나 낮으면 일하는 사람의 작은 수입으로 이어져 골란 하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원만한 가격이 나오도록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내가 견본 낸 물건들은 원만한 가격으로 기능공들의 불만이 없었다. 그리하여 노동조합에 가입을 결의하는데 나를 꼭 끌어들이려는 일들이 있었다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조합에 가입을 하게 되었다. 조합 가입원서를 쓰고 그 밤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 다음날이 큰문제로 대두되었다.


회사에서 그 내용을 알게 되어 노조 본부에 원서도 제출 못한 상태에서 회사에서는 발기 모임에 참석한 19명 모두의 사퇴를 종용하고 (속어)로 19명 모두 목이 잘리게 되었다. 회사에서는 회사 문을 닫어도 노동조합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노동조합 주동자들도 뒤로 빠지고 회사에서는 19명 모두 강제 사퇴가 기정사실로 되어갔다. 그 노동조합 가입 발기모임에서 나 자신이 발기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주동자들이 뒤로 빠지니 부위원장이 책임이 있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내 생각과는 정반대의 길로 서게 되었다. 하여 나는 공장장을 만나 협상을 하였다. 모든 책임을 내가 지고 나는 사퇴를 하고 다른 사람은 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였던 것이다.


회사에서는 누구누구가 주동을 하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의 사퇴로 일을 마무리 하려고 했던지 그것이 받아지고, 나는 그사이 돈을 원만히 모아 독립하여 사업을 하기로 하고 사퇴하였다. 그리하여 1973년 23살 때에 첫 개업을 하게 되었다.


그 때에 내가 잘 알고 있었던 분이 명동에서 제과점을 경영하였는데 나는 그분의 조언으로 왕십리 구 경찰 병원 옆에 동원극장 앞에서 개업을 하게 되었다. 그 때에 처음으로 퍼 먹는 크림이 ‘퍼머스트 크림’ 나오고 누가 바, 새로운 아이스크림이 나올 때었는데, 나는 그 명동에서 하고 있는 제과점을 왕십리에다 옮겨놓을 생각이었다. 제과점과 퍼먹는 크림, 퍼머스트를 같이 파는 가게였다.


장사는 원만히 되었다. 그 좋은 직장에서 보다 수입이 더욱 많았다. 하지만 주로 손님이 극장에 온 남, 여 연인들의 손님이었고, 학생들이 대부분으로 손님이 재법 많았다. 그러나 학생들이 담배를 피우고 하는 것을 보고만 있으니, 나의 마음이 괴로웠다. 내가 유년시절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인데 사춘기의 학생들이 담배를 피워도 피우지 못하게 말하지 못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이 더욱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그사이 나의 여자 친구가 임신을 하여 낙태 수술을 하였으니 더욱 나는 죄인으로 나의 영혼과 靈과 肉의 갈등에 늘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나는 어느 날에는 나 자신에게 반문을 할 때가 수없이 많았다. 너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야, 이렇게 돈 벌어 무엇을 하려야 하며 반문하고 또 반문하였다. 그 영, 육의 갈등이 더욱 깊어져서 도저히 영업을 계속하지 못할 정도까지 되었다. 하루라도 이 정신적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1973년 늦가을에 개업을 하여 1974년 초 여름 크림가게는 황금의 계절을 앞에 두고 폐업을 하였다. 내적인 영육의 갈등으로 영업을 못하게 된 것이다. 얼마나 심각 했는가! 골육의 뼈가 놀라는 괴로움이었다.